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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Jun 07. 2022

완벽하게 무너졌고, 또는 완벽하게 살아 있었다


 모든 날을 웃다가, 어떤 날에 불쑥 울적해지곤 할 때, 나는 너의 생경한 얼굴을 떠올린다. 익숙하지만 어딘가 낯선 얼굴에는, 전혀 본 적 없는 새로운 표정이 어른거렸다. 그걸 귀엽다고 해야 할지, 사랑스럽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다른 말로 그저 너의 난처함이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리둥절해하며 날 쳐다보던 그 표정을, 요즘 나는 아주 슬픈 날 떠올린다.

 아주 먼 옛일이었다. 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떠먹는 것처럼, 우리의 추억이 동그랗게 말려 올라갔다. 눈덩이처럼 걷잡을 수 없이 부풀었지만, 그걸 차마 단단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빙하가 녹듯, 우리의 시간도 세월이라는 따사로운 햇살에 점차 녹았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었고, 변형되지 않는 것은 없었다. 우리는 여름날 땡볕에 놓인 아이스크림처럼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흘러내리고 말았다.

 밀려 올라간 한 시절을 떠올리는 일은, 불쑥 슬퍼진 오늘날의 감정을 일시정지시켰다. 아이스크림처럼 주르륵 녹아버린 줄만 알았던 시간은, 또 다른 시간 속에서는 녹지 않았다. 아주 긴 빙하기에 갇혀 단단해져 있었다. 빙하기에 갇힌 시간을 사람들은 미련이라고 불렀고, 또는 후회라고 불렀다. 나는 후회 속에 언제나 그때의 일상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때의 네 생경한 표정과 두근거리는 심장소리와 하늘을 붉게 물들던 저녁놀까지, 아주 선명하게. 모든 게 완벽할 줄 알았고, 그러나 완벽하게 지켜지지 않았으며, 아주 완벽하게 무너졌고, 또는 가슴속에 완벽하게 살아 있었다. 아이스크림 같던 우리의 시간이 여러 차원의 시공간 속에 분산됐다. 어떤 시간은 흘러서 녹아 없어졌고, 또 어떤 시간은 이토록 선명하게 회상되곤 했으니까. 붉게 진 노을에 반짝이던 네 두 눈처럼, 미련은 밤중에도 두 눈을 밝혔다.

 울적해졌던 나는, 언젠가 덮어두었던 너의 얼굴을 떠올리곤 말없이 눈물을 닦았다.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단 한순간도 널 잊은 적이 없었다. 붉게 노을 진 하늘, 애매하게 무너지던 눈썹, 그리고 어정쩡한 손까지. 맞다. 그 순간의 너는 나에게 영원한 이별을 통보하던 때였다. 나는 그 순간마저 너에게 사랑을 느꼈다. 날 밀어내는 네가 밉지 않았다. 나는 모든 너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었다.

 ─ 너만 아프지 않으면 돼.

 어디 삼류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를 읊으며, 네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때 네 표정, 묘하게 일그러지던 그 표정을 잊지 못한다. 나에게 표현하는 마지막 예의이자, 네가 내게 보일 수 있는 미안한 감정이 얽혀 있었다. 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됐다. 너에게 내 마음을 미처 다 쏟아내지 못한, 나의 잘못이었다. 미련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도, 우리의 추억을 꽁꽁 얼려놓은 것도, 자꾸만 너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내가 너에게 잘하지 못한 탓, 널 최선을 다해 사랑하지 않은 탓, 마지막까지 널 붙잡지 않은 탓.

 우리의 추억이 냉동실에 처박아둔 아이스크림처럼 얼어간다. 언젠가, 아주 바짝 얼어 바스러지는 날이 온다면, 그땐 내가 널 잊을 수 있을까. 손 안에서 한 줌 물기로 녹아내릴, 그 축축하고 끈적한 단맛을 내가 완벽하게 잊을 수 있을까.

 글쎄, 나는 어쩌면 마지막 너에게 내뱉은 대로 살아가게 될지도 모르겠다. 너만 아프지 않으면 된다는 말은 곧, 이제부터 아픈 것은 나만 하겠다는 말처럼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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