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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Jun 11. 2022

우리는 색을 잃었고, 추억은 흑백이 되었다

 우리가 꿈꿔온 낭만에 추억이 있었다. 그땐 몰랐던, 소중한  모르고 지나쳐버린 시간들이, 알고 보니 우리가 무척이나 소망해왔던 시간이었다. 아주 뒤늦게 깨달았다. 우리의 세상이 무너지고  이후에야,  번의 사계를 흘려보낸 뒤에서야,  잃고  후에야.

 길길이 날뛰던 욕망과 아주 얕은 시기들이 뾰족뾰족 튀어나왔을 때, 그때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현상된 흑백사진을 컬러로 옮길 수 없듯, 우리의 지난 시간도 한 장의 흑백사진에 지나지 않았다. 너의 관심을 부질없는 참견으로 치부했던 날들. 그 속에는 알고 보니 너의 눈물겨운 인내가 있었다. 넌 언제나 기다렸고, 난 언제나 달아났다. 그게 상처가 되는 줄 알면서도, 나는 그저 나 좋을 대로 행동했다. 그게 너에게 아주 못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노을이 진득한 껌처럼 늘어지던 강변에서, 붉게 물들어가는 네 얼굴을 보면서, 나는 네 눈빛이 눈물로 젖어드는 줄도 몰랐다. 이미 지나고 보니, 우리의 흑백사진을 들여다보고 보니, 그때 네 눈가에 흐르던 것이 묽은 땀이 아니라 눈물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너는 애써 괜찮은 척하며 손등으로 물을 훑었다. 조금 덥다는, 초봄에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어쩌면 나는 그게 정말로 땀이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너에게 나쁜 사람이고 싶지 않았건만, 돌이켜보면 난 아주 나쁜 사람이었다.

 노을이 붉게 식어가는 동안, 나는 우리 관계를 다시 돌이킬 수 있을 줄 알았으면서도, 나의 오만함으로 널 밀어냈다. 넌 언제나 내 곁에 있을 거라고 믿었고, 시간이 훌쩍 지난 후에도 넌 그 자리에 있을 줄 알았다. 영원히 내 자리가 네 곁에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세상엔 '영원함'이란 없었다.

 그 오만함, 그 건방진 생각이 오늘날의 새벽을 만든 것이다. 달빛마저 차가운 밤에, 시린 별빛들을 바라보며 뜨거움을 회상하는 시간. 모든 게 차갑게 식어버리고, 그 뜨거운 붉은빛마저 흑백으로 변해버린 시간들을 나는 몇십 번이나 되새겼다. 어떤 날은 행복한 꿈으로, 또 어떤 날은 잔인한 악몽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뒤죽박죽 된 시간여행 속에서 나는 몇십 번이나 너와 이별했다. 그때마다 넌 눈물을 흘렸고, 난 그때마다 네 눈물을 외면했다. 꿈에서 깨고 나면 늘 후회했다. 시커먼 밤을 걷는 지금의 시간처럼.

  다시는 너에게 상처 주는  따위 없을거라고 몇 백번이나 다짐했다. 그러나 이미 돌이킬  없는, 그날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줄  없었다. 멀어지는, 아득해지는  뒷모습을 추종하는 나와 이번에야말로 보란 듯이 달아나버리는 너의 영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건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우리는 전혀 다른 입장이 되어 끈덕지게 이어 붙었다. 도망가는  너였고, 좇아가는  나였다. 우리가 이별하기 전에는 누가 옳은 건지   없었으나, 이별 이후에는 잘잘못이 극명해졌다. 사람이 마음이 식는 데는 이유가 없었고,  설명할  없는 이유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고,  마음따라 우리는 멀어져야만 했다. 우리가 친구가 아니라면, 언젠가 몸을 섞고 사랑을 나눈 사이었다면, 그게 세상에 정한 답이라면, 내가 너에게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반드시 헤어져야만 했다.

 그런데 왜 나는 너에게서 멀어질 수 없는 걸까. 최선을 다한 사랑이 아니라서 그럴까. 미련, 그 말도 안 되는 억지 같은 말만 늘어놓은 채, 계속 네 곁에 붙어있고만 싶었다. 정말 너에 대한 내 마음이 어떤 줄도 모르고, 널 진심으로 사랑하는지도 모르고, 밤마다 널 그리워하는 게 내 이기심인 줄도 모르고. 나는 그렇게 너에게 두 번째 상처를 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만약 우리가 다시 만나 서로 연인이라는 끈으로 이어지게 된다면, 어쩌면  너에게  번째 상처를 주게 될지도 모르겠다.  말도  되는 이유를 들먹이며 너에게서 최선을 다해 달아날 준비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마음은 그렇지 않다. 다시 네가  받아준다면, 네가  용서해준다면,   미련과 후회를 돌이켜 너에게  사랑을 듬뿍 주고 싶다. 만일 그럴  있다면. 흑백사진을 컬러사진으로 만들  있는, 그런 기적이 세상에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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