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꿈꿔온 낭만에 추억이 있었다. 그땐 몰랐던, 소중한 줄 모르고 지나쳐버린 시간들이, 알고 보니 우리가 무척이나 소망해왔던 시간이었다. 아주 뒤늦게 깨달았다. 우리의 세상이 무너지고 난 이후에야, 몇 번의 사계를 흘려보낸 뒤에서야, 널 잃고 난 후에야.
길길이 날뛰던 욕망과 아주 얕은 시기들이 뾰족뾰족 튀어나왔을 때, 그때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현상된 흑백사진을 컬러로 옮길 수 없듯, 우리의 지난 시간도 한 장의 흑백사진에 지나지 않았다. 너의 관심을 부질없는 참견으로 치부했던 날들. 그 속에는 알고 보니 너의 눈물겨운 인내가 있었다. 넌 언제나 기다렸고, 난 언제나 달아났다. 그게 상처가 되는 줄 알면서도, 나는 그저 나 좋을 대로 행동했다. 그게 너에게 아주 못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노을이 진득한 껌처럼 늘어지던 강변에서, 붉게 물들어가는 네 얼굴을 보면서, 나는 네 눈빛이 눈물로 젖어드는 줄도 몰랐다. 이미 지나고 보니, 우리의 흑백사진을 들여다보고 보니, 그때 네 눈가에 흐르던 것이 묽은 땀이 아니라 눈물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너는 애써 괜찮은 척하며 손등으로 물을 훑었다. 조금 덥다는, 초봄에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어쩌면 나는 그게 정말로 땀이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너에게 나쁜 사람이고 싶지 않았건만, 돌이켜보면 난 아주 나쁜 사람이었다.
노을이 붉게 식어가는 동안, 나는 우리 관계를 다시 돌이킬 수 있을 줄 알았으면서도, 나의 오만함으로 널 밀어냈다. 넌 언제나 내 곁에 있을 거라고 믿었고, 시간이 훌쩍 지난 후에도 넌 그 자리에 있을 줄 알았다. 영원히 내 자리가 네 곁에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세상엔 '영원함'이란 없었다.
그 오만함, 그 건방진 생각이 오늘날의 새벽을 만든 것이다. 달빛마저 차가운 밤에, 시린 별빛들을 바라보며 뜨거움을 회상하는 시간. 모든 게 차갑게 식어버리고, 그 뜨거운 붉은빛마저 흑백으로 변해버린 시간들을 나는 몇십 번이나 되새겼다. 어떤 날은 행복한 꿈으로, 또 어떤 날은 잔인한 악몽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뒤죽박죽 된 시간여행 속에서 나는 몇십 번이나 너와 이별했다. 그때마다 넌 눈물을 흘렸고, 난 그때마다 네 눈물을 외면했다. 꿈에서 깨고 나면 늘 후회했다. 시커먼 밤을 걷는 지금의 시간처럼.
다시는 너에게 상처 주는 일 따위 없을거라고 몇 백번이나 다짐했다. 그러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그날 흘러내린 네 눈물을 닦아줄 수 없었다. 멀어지는, 아득해지는 네 뒷모습을 추종하는 나와 이번에야말로 보란 듯이 달아나버리는 너의 영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건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우리는 전혀 다른 입장이 되어 끈덕지게 이어 붙었다. 도망가는 건 너였고, 좇아가는 건 나였다. 우리가 이별하기 전에는 누가 옳은 건지 알 수 없었으나, 이별 이후에는 잘잘못이 극명해졌다. 사람이 마음이 식는 데는 이유가 없었고, 그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고, 그 마음을 따라 우리는 멀어져야만 했다. 우리가 친구가 아니라면, 언젠가 몸을 섞고 사랑을 나눈 사이었다면, 그게 세상에 정한 답이라면, 내가 너에게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반드시 헤어져야만 했다.
그런데 왜 나는 너에게서 멀어질 수 없는 걸까. 최선을 다한 사랑이 아니라서 그럴까. 미련, 그 말도 안 되는 억지 같은 말만 늘어놓은 채, 계속 네 곁에 붙어있고만 싶었다. 정말 너에 대한 내 마음이 어떤 줄도 모르고, 널 진심으로 사랑하는지도 모르고, 밤마다 널 그리워하는 게 내 이기심인 줄도 모르고. 나는 그렇게 너에게 두 번째 상처를 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만약 우리가 다시 만나 서로 연인이라는 끈으로 이어지게 된다면, 어쩌면 난 너에게 세 번째 상처를 주게 될지도 모르겠다. 또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먹이며 너에게서 최선을 다해 달아날 준비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마음은 그렇지 않다. 다시 네가 날 받아준다면, 네가 날 용서해준다면, 내 이 미련과 후회를 돌이켜 너에게 내 사랑을 듬뿍 주고 싶다. 만일 그럴 수 있다면. 흑백사진을 컬러사진으로 만들 수 있는, 그런 기적이 세상에 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