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하는 감정 따위는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영원할 수 있다는 말만큼 오만한 속단은 없는 것. 그런 게 세상에 존재했다면, 이 세계에 전쟁이란 것도 벌어지지 않았을 테다. 나쁘다고 할 수 있는 감정들, 시기와 질투와 분노의 붉은빛 감정들은 사실 그렇게 나쁘다고 볼 수도 없는 것이다. 믿음과 배반 사이에서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영원한 약속이 없듯, 언제든 어그러질 수 있는 것이 서로에 대한 신뢰였다.
사랑에 대해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우리는 특정한 누군가와 아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관계는 한낱 뻔해 빠진 삼류 드라마에 불과했다. 한때 뜨겁게 사랑했던 어떤 이에 대한 배반, 그리고 특별하다고 믿었던 그때 우리 관계에 대한 배반이 큰 해일로 몰아닥쳤다. 우리는 다를 줄 알았는데, 조금 더 특별할 줄 알았는데, 그때 우리가 '운명'인 줄 알았는데. 우리가 믿었던 운명적 만남이라는 건, 작은 힘에도 무참하게 꺾여버릴 억새처럼, 가녀리고 연약한 환상 같은 것이었다.
당신이 날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기억이라는 건 늘 쉽게 변질되곤 했으니까. 아름답게 회상될 추억일지라도, 유통기한이 다한 식품에서 비릿하고 쿰쿰한 냄새가 나는 것처럼 누군가에게는 악몽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도 한때는 당신의 기억 속에 내가 행복한 꿈으로 각인되어 있길 바랐다. 언제든 다시 꺼내 읽어도 가슴이 뭉근해지는 한 편의 시처럼, 아껴서 소중하게 읽고 싶은 어느 소설의 한 문장처럼. 늘 환상 따위 없다고 말하는 나였지만, 사실 나는 당신에게 우리의 추억이 호접몽처럼 아련했길 바랐다. 나비처럼 흩어진 우리를 그리워하고, 또 언젠간 그런 날이 이어지기를 바라다가도, 꿈에서 깨어나면 이별에 애석해하며 온 몸을 파르르 떨길 바랐다. 당신이 끝까지 날 잊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당신이 그때의 우리를 묻어두길 바란다. 좋았던 순간에 대한 기억들, 사랑이 듬뿍 담긴 미움과 시기와 질투들, 온몸과 온 마음을 꺼내 내 앞에 바치던 정성, 마음 또는 그런 믿음과 신뢰들을. 날 위함도, 당신을 위함도 아니다. 단지 영원하다 믿었던 지난날의 우리, 그 운명적 순간들을 더는 훼손시키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 변형과 변질 속에서 집착이라는 구더기가 돋아났다. 우리는 다시 생생한 현실로 되돌아올 수 없는데. 이미 다 죽어버린 영혼과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과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 오히려 그런 현실들이 운명처럼 엮여 있었다. 우리가 언젠가 운명처럼 만나 사랑에 빠졌듯, 우리의 이별 또한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할 일이라고. 미련과 후회 속에 버물려지는, 그대로의 기억과 현실의 간절함으로 뒤섞이는 추억은 더 이상 아름다운 추억이 아니게 될 거라고. 어렸기 때문에 서투를 수 있던 지난날들. 그 순수한 날것의 시간들이야말로 우리가 서로에게 베푸는 마지막 배려이자 사랑일 것이라고.
"시간이 흐른 지금, 난 널 사랑하지 않아. 하지만 우리의 추억 속의 나는, 영원히 널 사랑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