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희영 Jun 27. 2022

사랑 앞에 우리는 모두 어린아이가 되지 않는가

 나만큼이나 지치고, 무뎌질 당신의 시선을 떠올려본다. 언젠가 우리가 함께 지낼 공간을 꾸미면서,   구석구석 하얀 페인트를 칠하며 입가에 웃음을 묻히던 날들. 한때 무심했던, 그러나 되돌릴  없는 잔인한 행복이 되어버린 시간들이 거품처럼 피어올랐다. 꺼뜨려도, 꺼뜨려도 계속해서  몸집을 부풀리는 거품. 잊으려, 덮으려 해도 차마 그러지 못하겠는, 소중한 기억들. 행복하고 소중한 시간들을 간직하려 이별을 택한 대가는 잔혹했다.

 냉혹한 현실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무너뜨려갔다. 때론 가슴에 자그맣게 남은 신념이나 가치관 같은 것도, 잘게 부수었다. 사랑이라는 연결 만으로도 충분히 끈끈할  알았던 우리 사이에 욕심이 생겨난 탓이었다.  내가 살기 위해 당신을 놓았는데, 당신은 당신이 살기 위해 나를 붙잡았다. 한참 그런 날들이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그런 사이 서로에게 수많은 상처만을 남겼다. 가슴에 오해가 쌓이고, 오해는 미움이 되었다.  미움 속에서도 사랑이 싹텄다. 서로를 탓하는  아니라, 가슴 저민 자책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서로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말없이 각자가   있는 노력들을 했다. 신이 아니면 뒤바꿀  없는, 물리적인 시간과 상황에 맞서 싸웠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만큼 의미 없는 시간들을. 변하지 않는 단단한 상황에 몸을  없이 부딪혔고, 망가뜨렸다. 우리는 현실을 굴복시키고 싶을 만큼, 서로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고 있었다. 그렇게 각자의 사랑을 깨닫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 버렸다.

 언젠가 당신에게 이별을 고하던  ,  여러 밤동안 서로의 어깨를 부둥켜 안고 울었다. 다시는 느끼지 못할 포근하고 따뜻한 . 당신이 아니면 느낄  없는 감정들이 가슴에서  빠져나갔다.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는 견고한 마음이 되려면 각자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걸 나는 영원한 이별을 하는 것으로, 당신은 잠깐의 시간을 가지는 것으로 해결하고 싶어했다. 결과는 달랐으나, 우리가 목표했던 것은 결국 같았다. 사랑을 지키는 . 나는 영원히 변하지 않을 애틋한 추억으로, 당신은 현재까지 지속할 뭉근한 사랑으로 남길 바랐다.

 당신은 어쩌면 현재의 사랑을 이어나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주 얇은 끈으로라도 우리가 연결되어 있기를 바랐을 테다. 나 또한 그랬었다. 당신을 잃는 게 두려웠고, 당신 없이 살아갈 나의 미래가 암담했다. 그러나 나는 이제 더는 당신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나로 인해, 현실로 인해 부서져가는 우리의 모습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을 테다. 우리가 공들여 쌓아 온 시간과 마음과 감정들이 쓰러지는 걸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그 여러 날에 켜켜이 쌓인 상처들이 서로에게 날이 선 칼날로 되돌아오지 않길 바랐다.

 차라리 다시 처음부터 쌓아 올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도 우리 한때 행복했는데, 사랑했는데, 죽고  사는 사이었는데.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또다시 각자의 신념과 가치관으로 서로를 해치게  테다. 우리는 각자의 삶을 지키고 싶어 안달이  테고, 사랑한다는 이유로 너무 쉽게 많은 것들을 훼손시킬 테다. 당신을 지키는 , 우리를 지키는 일은 어떤 걸까. 우리가 완전한 이별을 해야지만 가능한 걸까. 그렇다면  이별의 칼자루는 누가 쥐어야 하는 걸까.  잔인함, 뜨거운 피가 펄펄 끓는 사랑을 도려내는 일이란,  영혼의 일부를 죽이는 것만큼 힘겨운 일이었다. 우리가 망가지는  지키는  이별뿐이라면, 그걸 당신이   없다면, 내가 해야만 하겠다고. 내가 우리를 지켜내고  것이라고.  훼손의 권리를 져버리는 것이, 우리가 영원한 이별을 맞닥뜨려야만 하는 것이, 우리의 사랑을 온전히 지키는 일이라고.

 그 여러 밤동안 눈물을 머금고 당신의 가슴에 상처를 냈다. 그러면서도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사랑하는 이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이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아이러니 속에서도 그 행위를 지속해야만 한다는 걸, 이런 걸 어른스러운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 성숙한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 울음을 삼키며 이별을 힘겹게 받아들이려는 당신을 바라보며, 이해되지 않는 이별에 고개를 주억거리는 당신을 바라보며, 그래도 여전히 어여쁜 당신을 바라보며 울음을 삼켰다. 목구멍에 걸린 상처의 말들이 숨을 조였다. 그리고 이따금 귓구멍에 찡, 하고 이명이 울려 퍼졌다.

 사랑 앞에 우리는 모두 어린아이가 되지 않는가,라고.

 그럼 나도 아무 생각 없이 당신을 사랑하고 싶다, 고.

 울음을 삼키고는 겨우 힘겹게 눈물을 닦아냈다. 기다려 주겠느냔 말을 뱉어냈다가 다시 삼켰다. 우리 조금 뒤에 다시 만날래? 아니, 아니야, 기다리지 마. 혼자서 내뱉고, 혼자서 덮는 힘겨운 이별.


 서로가 서로에게 무척이나 과열되어 있던 시간. 그래서 눈물과 상처만으로 얼룩진, 그 사이 천천히 식어가는 사랑을 내려다보는 시간. 어린아이처럼 당신을 사랑하기에는 수많은 차가운 현실이 내걸린 시대. 눈물을 닦아내며, 사진 한 장으로 남은 당신의 모습을 내려다본다. 이제 더는 우리, 서로에게 상처 주지 말자고, 아주 힘겹게 되뇌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너의 바다와 나의 해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