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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Jun 30. 2022

범람하는 감정의 바다, 잠겨 죽어가는

 생각의 바다가 범람했다. 넘치지 않을 줄 알았던 파도는, 약해진 썰물의 중력에 점점 제 자리를 잃어갔다. 섬 곳곳에 어여쁘게 꾸며놓은 작은 마을들이 침수되었고,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기분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점점 잠겨가고 있었다. 생각의 골이 깊어갈수록 물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 다 괜찮아질 거라는 진담 섞인 농담에도 차마 웃을 수 없었다. 어둠이 짙어지는 밤이 지속될 때마다, 나는 깨어나지 못할 깊은 잠에 빠져드는 꿈을 꿨다. 그런 잠에는 오히려 꿈이 없었다. 삶도, 세상도, 우리도, 당신의 모습도 떠오르지 않는, 진정한 無의 세상.

 파도가 밀려와 턱밑까지 찰랑 차올랐다. 주변에서는 이제 너무도 쉽게 당신과의 관계를 묻곤 했다. 어떻게 했느냐고, 마침내 헤어지게 되었느냐고, 잘했다고, 그 사람이 끊어낼 수 없다면 네가 했어야만 했다고. 나는 화살처럼 쏟아지는 질문들을 회피하며 고개를 저었다. 마음속에는 반문하는 질문들이, 침몰하는 뱃머리처럼 이따금 바다를 차고 올라왔다. 정말 잘한 것 맞느냐고,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이 맞느냐고. 나의 몸은 차가운 심해로 점점 빨려 들어가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내 마음속 세상에는 이미 날씨와 같은 자연현상은 없었다. 오직 밀물과 썰물만이 현존하는, 고요한 바다 위에 부서지는 파도소리만이 그득한 세상이 되었다. 그토록 어여쁘게 가꿔왔던 마음들은, 그리고 다짐들은 아주 쉽게 부서지고 말았다. 이것을 뭐라고 해야 할까. 감정의 해일이라고 해야 할까, 우울의 범람이라고 해야 할까. 사람들은 아주 쉽게 나의 기분을 물었지만, 나는 내 기분을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웠다. 어떤 날은 슬프기도 했고, 개운하기도 했다가, 무섭기도 했다. 내 몸이 바다에 쓸려나가는 동안, 심해로 빨려 들어가는 동안, 어쩌면 나는 차가운 감정 속에 익숙해져가고 있던 걸지도 몰랐다.

 하루 종일 당신이 그리울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 만은 않았다. 당신을 잊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쳤던 날들이 있었다. 아까운 시간들을 마음껏 쓰고, 사람들을 만나 기분들을 공유하고, 그러는 사이 천천히 당신을 묻어가는 연습을 했다. 그래서 그렇게 묻힌 줄 알았는데, 당신을 거의 다 잊은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짙은 어둠이 내리면, 새벽이 점점 더 차가워지면, 어둠과 새벽이 몸을 뒤섞는 그 찰나의 순간에 당신이 떠올랐다. 그리고는 사무치게 당신이 그리웠다. 하루 종일 잊고 살던 당신에 대한 그리움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나는 심해에 몰아치는 물살에 온 몸과 마음이 휘감겼다. 잊은 줄 알았는데, 덮은 줄 알았는데, 나는 전혀 당신을 덮지 못했다.

 당신이 어찌 사는지 궁금했다. 당신은 나를 완벽히 잊었을까, 어쩌면 완벽히 덮었을까. 하지만 어떤 방법으로도 당신의 소식을 알 수 없었던 나는, 천천히 다시 당신의 사진을 덮었다. 평생 당신을 추억하며 살려했건만, 요즘 당신을 회상하는 일은 해일에 휘감겨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일이 되었다. 당신을 떠올리는 게 전혀 행복하지 않은 일이 되었다. 언젠가 당신이 좋아서 죽고 못살던 날들이 있었는데. 분명 그랬었는데.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날 날이 올까. 그땐 당신 앞에 울면서, 당신을  껴안아줄  있을까. 시간은 모든 감정과 기억들을 망각하고 왜곡시켰다. 그때어쩌면 당신을  애절하게 사랑하고 있을 수도 있고, 당신을 미워할 수도 있고, 또는 완전히 덮었을 수도 있다. 미래의 우리 모습은 어떨까.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난다면,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난다면.

 그때의 당신은 어떨까. 날 완벽히 덮었을까, 전혀 덮지 못했을까. 이제는 어떻게 흘러가야 하는 줄 모르겠다. 어떤 날은 날 잊지 않길 바랐다가, 또 어떤 날은 날 완전히 잊길 바랐다. 당신에게 좋을 일이라면 모든 걸 납득하겠노라 다짐했건만, 사실 난 여전히, 당신의 현재에서 사라지는 게 두려운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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