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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Jul 12. 2022

쪽빛 푸른, 제 5의 계절에서 만나자

 1.

 원만한 사유에도 불편한 감정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걸 진실로 믿었지만, 나는 때로 그걸 진심으로 믿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엔 이 사람을 붙잡고 일방적인 약속만을 내뱉었다. 내가 널 이토록 사랑하는데, 왜 넌 자꾸 도망가려고만 하느냐고. 이걸 극복하면 한층 더 성장한 사랑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그 사람은 눈물지으며 나에게 애원했다. 당신을 사랑하지만, 이제 더는 당신을 사랑할 수가 없다고.

 당신이 날 사랑하지 못한 데는 여러 이유들이 존재했다. 나는 그런 현실적인 이별의 사유들을 납득하기 어려워서, 그 사람을 끝까지 이해할 수 없어서, 결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2.

 이런 사랑의 끝에는 어리석은 자책과 상흔과 후회만이 남는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저 시간과의 싸움, 고통을 홀로 감내하는 과정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홀로 남아있어 보니 당신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원래 태생부터 한 몸이었던 게 쑥 빠져나간 것처럼. 가슴 한구석이 텅 비고 공허해졌다. 그때야 당신의 눈물이 떠올랐다. 당신은 이별의 과정이 고통스러울 줄 알면서도, 이렇게 공허하고 힘겨운 사투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끝을 말했던 게 아니었을까.

 후회는 지난날 당신의 눈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나 혼자서만, 사랑의 고통을 견딜 수 있다는 자신감에 들어차, 눈물짓는 당신의 얼굴 따위는 보지도 못했다. 아주 잠깐, 이렇게 도망치는 것을 택한 당신을, 아주 멀리 달아나려 당신의 뒷모습을 보며 원망하기도 했다. 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는, 모든 걸 이겨낼 수 없는 것이냐고. 그러고는 다시 후회에 머리를 쥐었다. 두려움에 몸을 떠는 당신을 진심으로 알아주지 못한, 지난날 내 모습 때문이었다.


 3.

 먹먹한 마음을 창밖을 바라본다. 뜨거운 여름의 아지랑이가 아스팔트에서 피어오른다.

 따가운 햇살 아래 온전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름 땡볕에 세상의 것들은 스러져가기 시작했다. 활짝 피어 예쁘게 웃던 꽃도, 울창하고 푸른 잎을 자랑하던 나뭇잎도. 꽃이 지고, 잎사귀가 식을 때 즈음 한 계절은 천천히 죽음을 맞이했다.


 4.

 당신과 나의 사랑도 어쩌면 죽었다 다시 태어나는, 그런 숭고한 시간이 되지 않을까.


 5.

 세상에 사랑은 여러 종류의 색깔로 제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내가 품은 사랑을 푸른색이라고 말하고 싶다. 햇살에 찬란하게 반짝이는, 쪽빛 푸른 빛깔이라고. 햇볕이라는 고통 속에서 더욱 찬란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라고. 그래서 어쩌면 우리의 사랑도 더욱더 아름답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고. 그 푸른 마음을 안고, 언제까지나 당신을 기다리겠다고. 가슴에 새파랗게 물든 상처와 고통, 속으로 되뇌는 처절한 비극의 밤들을.


 6.

 우리의 계절이 겨울의 빛깔을 향해 나아간다. 눈이 흩날리는 백색의 계절은 사실 모두가 죽어 없어진 검은색이다. 검은색의 계절, 생명이 없는 계절, 감정도 꽁꽁 얼어붙은 계절 하지만, 땅 밑에는 따뜻한 씨앗이 잠을 자고 있는 계절. 그 계절 곁으로 걸어 들어간다. 우리의 사랑이.


 7.

 사계가 굴러가듯, 제4의 계절인 겨울을 지나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우리에게도 다시 따뜻하고 찬란한 봄이 찾아올까? 아니, 나는 다시 도돌이표처럼 봄날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 언젠가 우리가 또다시 이런 비극의 이별이 맞을 수도 있다는 뜻일 테니까.

 우리가 이 겨울을 지나면, 우리의 사랑은 계절로 명명할 수 없는 다른 세계로 가있었으면 좋겠다. 그곳은 뜨거운 여름이 되어도, 차가운 겨울이 되어도 굳건하고 단단할 테니까.


 8.

 그때가 되면 우리, 활짝 웃으며 서로를 꼭 안아주자.

 ─ 긴 겨울, 사랑의 사망이나 다름없는 검은 계절을 잘 이겨내 왔어. 우리 다시, 그 쪽빛 푸르던 아름다운 빛깔로 서로를 품어주자.


 9.

 ─ 그때는 날 다시 받아주겠니?


 10.

 ─ 그래. 우리, 다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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