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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Jul 14. 2022

crossing

 어쩌면 내가 널 신뢰하지 못했나 봐. 너는 늘 내 곁에 있을 수 있다고 말해왔는데 말이야. 그게 어떤 날을 기점으로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모르겠어. 널 사랑하는데, 널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이 되어 버렸어.


 생각해보면 우리의 지난 사계절이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왜 늘 널 생각하면 소나기와 눈이 생각 나는 걸까. 쏟아지는 빗소리와 소음을 삼켜버린 눈발 사이에는 미묘한 공통점이 있었어. 온전히 너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던 거야. 난 네가 무언가에 집중할 때마다 너의 얼굴을 쳐다보았어. 신나게 무언가를 설명하는 모습이 나에게는 참 예쁘게 보였거든. 처음의 네 모습은 이렇지 않았는데. 날 만나면서 네가 건강하게 변했다고 생각하니까 정말 행복했어. 온전히 우리가 만들어져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날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쩌면 난 널 길들이려고 했던 게 아닐까. 지금은 또, 길들여지지 않는 너에게 이별이라는 협박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헤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이야. 이별을 먼저 고한 건 난데 이상하게 견디기가 힘들어. 난 사실 너와 헤어질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거야.


 명확히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어. 어렴풋이 짐작해보건대, 현실적인 이유들이 부딪히기 시작하면서부터 였던 것 같아. 난 늘 감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돌이켜보면 난 완벽한 현실주의자였어. 오히려 현실주의자였던 네가 감상적인 사람이 되었지. 어떤 접점을 지나치게 되면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너무나 닮아버린 나머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어. 이젠 네가 어떤 모습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게 된 거야. 이젠 네가 이전의 나를 사랑하는지, 지금의 나를 사랑하는지 조차도 모르게 되었어. 나의 어떤 모습을 사랑하고 있는지 모르니까 점점 두려워지기 시작했어. 혹시 네가 달라진 날 미워하게 될까 봐 말이야.


 그래서 도망쳤던 거야. 어쩌면 그랬던 거야. 네가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


 널 기다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이제는 쏟아지는 소나기만 보아도 네 생각이 나. 새벽 내 온 방안을 울리던 빗소리가 꼭 네가 오는 소리 같아서. 나는 이제 어떻게 지낼 수 있을까. 종종 비가 쏟아질 때마다, 한겨울 눈이 흩날릴 때마다 나는 또 네 생각을 할 텐데. 빗물이 옷깃을 천천히 물들여가듯, 같은 사람이지만 조금씩 달라진 네 모습도 사랑할 텐데. 나는 예전의 너와 지금의 너, 모든 너의 모습을 좋아해. 네가 날 미워하지 않을까, 실망하지 않을까 가슴 졸이면서도 말이야.


 그런데 나도 잘 모르겠어. 어느 날 부서져버린 우리의 신뢰가 어디서부터 어긋나 버린 것인지를. 이런 내가 너에게 다시 손을 뻗어도 되는지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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