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희영 Jul 18. 2022

내 영혼의 장례를 치르는 날, 나는 다시 태어나겠어요

 빠져 죽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의 나는 그런 마음이었다. 열정이 죽어 없어지는 날, 내 영혼의 장례를 치러야 하겠다고. 그러나 우울은 끝도 없이 내 발목을 잡고 끌어내렸다. 넓은 기회의 바다에서 나는 점점 헤엄치는 법을 잃어갔다.


 대체 얼마나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느냐고 울부짖었다. 내면 깊숙이, 아무도 들리지 않을 마음속 바다에서 나는 소리 없이는 물거품만 뿜어냈다. 나의 몸, 나의 영혼이 물거품이 되어 바스러졌다. 힘든 것을 넘어선 벅참. 인생이 참으로 벅차다.


 그래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한다. 언젠간 좋은 날이 올 거라고. 그럼 나는 되묻고 싶어졌다. 왜 살아야 하느냐고. 대체 그 좋은 날은 언제 오는 거냐고. 고분고분, 네, 열심히 살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던 날들이 지났다. 열심히 살면 쥐어지는 것이 하나라도 있을 거라는 말은 다 거짓말이었다. 대체 얼마나 더 많은 나의 하루가 사라져야, 내 영혼이 갉아먹어져야, 얼마나 몸이 닳아져야 원하는 것을 그러쥘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되는데, 용을 써도 안되는데. 되지 않는 걸 해내라는 말처럼 느끼는 것 같아, 삶은 참으로 잔혹했다.


 세상을 헤엄치는 법을 잃어갈수록, 나는 점점 빈껍데기 하루를 보냈다. 삶의 목적 없이, 단단한 목표 없이 흘러 보내는 삶. 꾸준히 하면 된다는 말에,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반복적으로만 살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어떤 목표를 가지고 살던 날들이 있었는데 말이다. 멋진 사람은 아니더라도, 소소하게 무언가를 이루며 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런 것들이 부서 없어졌다. 열심히만 사는 삶에 신물이 났다. 왜,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열심히만 살아야 하느냐고.


 세상은 내게서 나의 소중한 것을 하나씩, 하나씩 앗아갔다. 위태로운 젠가처럼 하나씩, 하나씩 나무토막이 빠져나갈 때마다 나는 중심을 잡기 위해 무던 애를 썼다. 조금만 더 버텨보자고, 버텨보자고. 스스로를 달래며 하루를 일 년같이 보냈다. 지쳐서 죽을 것 같을 때는 이미 벼랑 끝에 손가락 힘으로 버텨 보고 난 이후였다. 나에게 겨우 숨 붙어살라며 붙여준 것은, 오히려 날 더 어둠 속으로 몰아냈다. 왜 사는 줄도 모르겠는데, 힘겹게라도 살라며 붙여준 삶 같았다. 죽지 않기 위해 살고, 절망에 빠지지 않기 위해 살았다. 그런 삶이, 이젠 너무나 버겁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산다는 말이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남들도 나처럼 이렇게 버거우면, 대체 그들은 무슨 동력으로 삶을 살아갈까 궁금했다. 나는 점점 왜 살아야 하는 줄도 모르겠는데, 헤엄치는 법을 잃어버렸는데, 자꾸만 심해로 빠지고만 있는데.


 ─ 왜 우리가 살아야 해?


 아직도 이 물음에 명확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아무렇게나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속은 얼마나 썩어가고 있을지 아무도 알지 못할 테다. 자신의 속도 들여다보지 못하는데, 어찌 타인의 삶을 쉽게 왈가왈부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남들도 다 그렇게 사니, 너도 그렇게 살으라는 위로 같지 않은 위로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얼마나 몸이 부서져라 이겨내 왔는지 알지 못하면서, 헤엄치는 법을 찾기 위해 무던 애를 써왔던 내 기분이 어땠는지 알지 못하면서.


 나는 오늘도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해답도, 정답도 없는 미스터리한 질문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