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기억은 마치 동상에 걸린 기분이다. 무뎌진 것 같으면서도 따뜻한 온기에 닿을수록 얼얼하고 간지러운. 그래도 지속적으로 따뜻한 기온을 쬐어주면 무뎌질 수 있는. 다른 일에 한눈 팔려 정신없이 지내다 보면 잊게 되기도 했다가, 또 한 번씩 불쑥 아픈 통증으로 찾아오곤 하는 기억. 나쁜 기억도 그저 흐르는 물처럼 흘려보내라는 말도 있지만, 그게 어디 내 맘대로 될까.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이따금 혼자 있으면 그때의 기억으로 빨려 들어가곤 한다.
곱씹을수록 더 선명해지고, 더 선명해질수록 아무렇지 않은 이가 원망스럽고, 꼭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느냐고 이유를 캐묻고 싶곤 했다. 그러나 그런 캐물음도 아무 의미 없게 느껴졌다. 이미 벌려진 일, 돌이킬 수 없는 실수, 머릿속에 진하게 새겨진 기억은 이미 오염될 대로 오염됐다. 내가 생각하는 지난 일들이 그저 오해였다면, 먼저 풀어주었으면 했다. 차라리 미안하다고, 실수였다고 핑계라도 대주길 바랐다. 그러나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 모르쇠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나는 어떻게든 풀어보려는 마음도 닫아버리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그 사람은 늘 이기적으로 회피하며 살았던 것 같아서.
누구에게 사실을 털어놓은 들 해결될 리 없고, 그렇다고 가슴에 담아두자니 속이 썩을 것 같아서 미칠 것 같을 때, 나는 애써 그 사람을 원망하지 않기로 한다. 그가 나에게 용서를 구하지도, 핑계를 대지도 않았지만, 내 안에서 흘려보내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야,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끊어지지 않을 원망의 쇠사슬에 묶인 채로.
그리고 그런 생각들에 곱씹어질수록 더더욱 그 사람이 괘씸해진다. 나에게 상처 준 일을 다 기억하면서도 기억나지 않은 척, 그게 참 꼴 보기가 싫은 것이다. 대인배처럼 마음을 다스리다가 나는 결국, 모든 것을 차단한다. 그냥 당분간은 내 눈앞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시간이 지나면 기억도 무뎌지기 마련이다. 동상의 통증도 서서히 없어지듯이. 하지만 이 기억도 과연 그렇게 될까? 모든 게 무뎌지는 날이 오면, 내가 다시 웃으며 널 볼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지금이라도 차라리 용서를 구한다면 모를까.
기분 나쁜 기억이 계속해서 밀려 나올 때는, 애써 다른 일을 하려고 애쓴다. 그 기억을 덮어버릴 다른 행동들. 이를 테면 쉴 틈 없이 무언가를 보고 있다거나, 정신없이 일을 해댄다거나, 고단한 노동으로 쓰러져 잠에 들게끔 만드는 것. 그렇게 해서라도 무뎌질 수 있다면, 잊어버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나쁜 기억을 최대한 되새기지 않으려 한다. 그 녀석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더 선명해지고, 선명해지면 더 오랫동안 잊을 수 없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