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계절도 바람의 세기는 같지 않았다. 어느 순간에도, 어떤 햇살에도, 또는 어떤 세기에도 굴하지 않는 마음이 있었다. 각자의 마음에서 불어온 바람은 그렇게 환경에 따라 또는 시대에 따라서도 한결같지 않아서, 여러 다른 사람들의 입술에서 달리 해석될 수 있었지만, 그런 해석에도 바람은 끊임없이 불었다. 누군가를 험담하는 목소리, 우는 소리, 화내는 소리, 기도 소리, 진심의 소리. 각기 다른 계절의 바람으로 어떤 이는 부서지기도 했고, 또 어떤 이는 밤새 몸살을 앓기도 했다. 그렇다고 꼭 기분 나쁜 아픔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떤 순간에는 행복하기도 했었겠지만, 어찌 되었든 끝은 늘 아프게만 남았다.
그 수많은 말 중,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에 담긴 바람은 향긋한 진심을 품고 있기도 했다. 어느 고운 봄날, 들녙에서 불어온 새싹의 내음이라거나, 햇살 밑에서 바짝 말린 오래된 책장에서 풍기던 종이 내음 같은 것처럼. 그 사랑한다는 말과 표현 한마디 만으로도, 황폐했던 나의 사막 같던 세상에 물이 솟아났다. 나는 언제고 그 마르지 않은 감정으로 나를 사랑한다는 이를 품어줄 수 있었다. 당신과 내가 가꿔온 세상. 우리만의 세상, 오아시스. 그 사랑이 차올라 아름다운 호수가 되었을 때, 세상의 기분 나쁜 말들은 호수에 부딪혀 물살을 일으키곤 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어느새 호수는 나의 든든한 마음이 되었다.
그러나 나의 마르지 않는 호수의 물을 마시려 달려드는 이가 있었다. 나에게 자꾸 사랑을 달라고 했다. 그 어떤 이의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모습은 한 편으로는 갸륵하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로는 이해되기도 했다. 외로워, 사무치게 외로워, 나 좀 안아줘. 내면에 외로움이 솟아오르는 이의 바람, 그가 내뿜는 입가에서 새어 나온 바람은, 아주 아리고 차갑다. 나의 온 세상을 얼려버릴 만큼 서늘한. 그의 말 한디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사람의 바람이 무척 차다는 걸, 이 찬기운을 받아들였다간 아주 크게 아프고 말 거란 걸. 바람은 말이었다. 나는 외롭다고 말하는 이의 말을 흡수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단지 외롭기 때문에 사랑을 갈망하는 이를 주의해야 했다. 사랑으로 채워온 마음이 온통 얼어붙을 수 있었으니까.
만약 누군가에게 상처되는 말을 들어 마음이 얼어붙으려 한다면, 따뜻한 양지로 올라오면 된다. 내게 상냥한 말을 전하며 따뜻하게 품어줄 사람, 그런 봄날 같은 햇살을 쬐어줄 사람, 그런 햇살 같은 바람을 불어줄 사람을 찾아야 한다. 밤새 몸살을 앓고, 찬 곳에 있던 수많은 사건 사고들이 없던 일처럼 치부된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밝은 세상밖으로 나오려 애를 써야 한다. 바깥은 여전히 따뜻한 햇살이 있고, 상냥한 풀 내음이 있다. 손끝에서 부서지는 기분 좋은 흙의 촉감을 만지며, 사랑을 한껏 느껴보자. 괜찮다. 이제 이곳은 더 이상 외로운 자들의 소굴이 아니다.
외로운 자에게 사랑을 채워주기 위해서 애쓰지 않아도 된다. 그들의 사랑은 그들의 방식대로 채워나가도록 두어야 한다.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을 나누어 주었다간, 나의 삶마저 황폐해질 테니까. 그럴 때면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던 사람마저 떠나게 될 테니까. 지금 이 순간, 무엇이 중요한지를 명확하게 깨달아야 한다. 외로움에 득달같이 달려드는 이들보다 더 중요한 것. 나는 지금 누구의 인생을 살고 있는가? 어떤 세상을 가꿔나가고 있는가? 바로 나 자신이다. 그렇다면 나라는 세계를 지키기 위해선, 내가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세상의 숱한 유혹과 날이 선 말에도 단단해질 수 있도록.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으로 채워놓은 나의 세상을 지켜야 한다. 나의 호수에 물을 채우자. 세상의 차가운 말들에 흔들리지 않을, 아주 거대한 호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