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어떤 잔잔한 가능성들이, 희망차게 보일 때도 있다.
그렇게 살면 불행하지 않을 거라는 듯이.
나는 사실 행복해지고 싶었던 게 아니라, 불행해지고 싶지 않은 것 아니었을까?
오히려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불행'이라는 단어에, 고개를 젓는 대신 끄덕이고 말았다.
그렇다, 나는 최선을 다해 불행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삶은 그렇듯 마음먹는 대로 살아지지 않았다.
때론 사랑하는 사람을 타이밍이 어긋났단 이유로 떠나보내야만 했고,
또 어느 날엔 원치 않은 일을 떠맡아 속앓이 하기도 했다.
그때의 나는 왜 스스로 괜찮다고 다독였던 걸까?
나에게 닥친 일련의 사건들은 그래도 '최악의 불행'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최악의 불행'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나에게 닥친 불행이 최악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능력은
내가 인생을 더 많이 살고, 적게 살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동안 책을 많이 읽은 것도, 실패한 다른 이의 경험에 귀 기울인 것도 아니었다.
세상의 온갖 잡다한 감정들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꾸역꾸역 내 귀로 밀려들었다.
요즘 세상이 그랬다.
내가 알고 싶지 않은 지식마저,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귀에 꾹꾹 눌러 담았다.
삶이 버거워 힘들다는 이의 사연을 들었을 때,
진심 어린 조언보다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이 요즘의 현실이었다.
─ 그래, 난 저 사람에 비하면 힘든 것도 아니지.
─ 조금만 더 참자. 난 아직 괜찮잖아.
왜 우리는 타인의 불행을 자신을 위로하는 도구로 사용할까?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시집을 찾아 읽지 않게 된 이유는,
어쩌면 타인의 불행을 통해 위안 삼을 수 있게 되어서 그런 것 아닐까?
지친 자신의 마음을 치유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수많은 감정들이 시체처럼 떠오른 정보의 바다에서
오늘도 안도의 숨을 내쉬며 살아간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자신에게 필요한 위안이 아니라
오히려 꾸역꾸역 참으라고만 다그치는 독약인데도 말이다.
언젠가 나도 세상이라는 차가운 바다에서
죽어버린 감정으로, 또는 그런 사연으로
시체같이 둥둥 떠다닐 수 있음을
그리고 때론, 그렇게 죽어 있어도 됨을
언젠가 깨달을 날이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