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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Jul 27. 2022

우리가 사랑한 날들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필수불가결  (必須不可缺)

 매미 우는 소리가 짙게 깔리는 계절에, 흙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모든 날들이 푸르렀노라고. 아지랑이 낀 언덕에서 숨을 고르게 쉬던 네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하던 말. 아주 평온한 상태가 되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던 우리는, 언덕길 옆 나무 아래 털썩 주저앉아 마른 목을 축였다. 너는 늘 매년 점점 더 더워지기만 한 여름을 두고, 푸른 나뭇잎만을 바라보았다. 마치, 좋지 않은 날들은 머릿속에 각인시키고 싶지 않다는 듯이.


 어쩌면 그런 난장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기약 없는 내일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서로 내뿜는 미움 속에서도 사랑이란 감정이 따라붙었다. 어떤 날은 네가 미워 죽겠다가도, 그래도 그 속에 사랑이 있었다. 넘실거리는 여름날 아지랑이처럼, 태양의 열기가 식으면 자연스럽게 증발해버릴 가벼움처럼. 넌 영원한 긍정을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태양의 열기보다 시원한 푸름을 조금 더 기억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만남에는 이별이 있었고, 그건 당연한 진리처럼 흘렀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만난 어떤 날처럼, 그런 계절처럼, 우린 또다시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되고 말리라. 땀을 닦으며 의도적으로 혹은 무심코 뱉어낸 네 말처럼, 모든 날들이 푸르렀던 것처럼, 우리의 기억도 푸른 기억으로 각인되기를 바랐다. 왜 계절은 뒤바뀌고, 사랑은 식는지를 스스로에게 묻던 너는, 결국 답을 찾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걸 알았다면 우린 신이었다고, 신이 시작과 끝을 만들었기에 우리는 그저 따라야만 한다고. 꽤 심각해진 내 목소리도 침잠해져 있었음을 너는 알고 있었을 테다.


 ─ 결혼하지 않으면 헤어져야 한다는 게 웃기지 않아? 우리가 결혼을 하기 위해 사랑을 하는 건 아니잖아.


 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쓴웃음을 지었다. 세상은 긴 세월 동안 몸집을 불려, 저들만의 사회를 만들며 살아왔다. 그 거대한 몸집에 맞서기에는 우리의 삶이 초라하고 작았다. 먼지 한 톨의 삶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지도 못했다.


 불안정한 시간을 안정적인 영원함으로 매듭짓기 위해서는, 사회가 정해놓은 제도를 따라야만 했다. 그것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필수 불가결한 것은 아니었음에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그것을 따랐다. 너는 한 시대의 반항아로, 제도를 종잇장처럼 구기고 싶어 했다. 얽매이고 싶지 않다고, 누군가의 삶을 책임지고 싶지 않다고. 그 말은 무책임한 어린아이의 발언처럼 느껴졌는데, 또 한 편으론 대범한 용기처럼 보였다. 사회의 일반적인 틀을 거스른다는 것은, 광장에서 홀로 항변하는 외로운 싸움처럼 느껴졌으니까.


 너의 용기를 응원해서 이별을 수락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결혼을 하지 않으면 헤어져야 한다는 게 웃기지 않아?"라고 반문하는 네 모습을 온전히 이해한 탓도 아니었다. 단지 네가 그 선택을 바랐기 때문에, 네 선택을 존중했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한 네 모습마저도 사랑했기 때문에 이별을 수락한 것이었다. 네가 미웠고, 또는 널 사랑하는, 이 온전하지 못한 마음을 어찌하랴.


 넌 영원한 푸름을 바랐지만, 난 어쩌면 우리가 가벼운 아지랑이처럼 영원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아주 쉽게 증발하고, 또는 사라져 버릴 관계라는 것. 이별 따윈 없는 영원한 관계라고 생각했던 우리의 사랑이 아지랑이처럼, 서로의 인생에서 차츰 잊혀버릴 관계라는 게 가슴이 아프다. 또 한편으론 서글프고 아려서 이별이 더욱 잔인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 이제 그만 일어날까?


 내가 먼저 일어나 그늘에 앉아 쉬는 너에게 손을 뻗었다. 너는 손을 잡으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 이제 가야 해?

 ─ 응, 가야지.


 우리가 함께 시간을 써나갈 수 없다면, 이제는 각자의 삶을 살아가야 할 테다. 넌 너대로, 난 나대로.

 우리, 그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 좋은 얼굴로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이루어지기 힘들, 아주 얕은 희망을 품고 살아갈 내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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