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희영 Jul 22. 2022

널 그리워하는 연습


 널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겠다고. 네가 날 잊고 잘살게 되더라도, 나는 오래도록 널 내 가슴속에 품고 있을 것이라고. 그 다짐은 어느새 집착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널 그리워했던 게, 이제는 점점 작위적으로 바뀌어갔다. 널 그리워하기 위해 애쓰기 시작했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사실이었다. 네 모습이 점점 흐릿해져 간다는 게.


 창문 앞에 앉아 쏟아지는 빗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창틀에 물을 튀기는 소나기의 장난을. 손바닥으로 튀기는 빗물을 막아보다, 손끝으로 비를 만졌다. 부서지는 빗줄기, 어디로 튈지 모르는 빗방울, 그리고 그걸 아무 생각 없이 내려다보고 있는 나.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는데, 나는 생각에 잠겨 애써 네 모습을 떠올렸다. 언젠가 우리가 비에 대한 추억이 있었던가를.


 '생각해보니, 우리의 첫 데이트가 있던 날은 비가 왔었지. 그때 넌 늦었고, 잠시 있던 카페에 우산을 놓고 왔다고 했지. 혹여 더 늦게 될까 봐 우산을 다시 찾으러 가지 않고 온 몸으로 비를 맞고 왔다고 했지. 그럼에도 늦은 넌 애써 웃으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지. 그때 난 어땠지? 아니, 우리 모습은 어땠지?'


 기억은 선명했지만, 이상하게 그때 느꼈던 감정은 아련해져 있었다. 그때 넌 정말 바보같이 순수했었는데, 그때의 나는 널 보고 무척 귀엽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따뜻하지만 어딘가 바보 같은 구석이 있던. 제3의 영혼이 되어 우리에게서 널찍이 떨어져 본다. 그 둘을 내려다보는 제3의 영혼이 된 나는, 두 사람의 감정을 추측하고 있었다. 그때 난 무슨 마음이었지? 그때 넌 어떤 모습이었지? 그때 우리는, 서로 어떤 눈빛이었지?


 그러나 그런 식의 그리움을 연습하는 것은, 더 이상 나에게 먹히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애써 기억해내야만 하는 추억들로 시간을 보냈다. 비를 보면서, 물을 마시면서, 홀로 영화를 보면서 끊임없이 널 떠올리려 애썼다. 그때 넌 이랬지, 에서 그때 넌 어땠지?로 바뀐 질문은, 아주 미묘하지만 확실히 달랐다. 이제는 내가 널 자연스럽게 떠올리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널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널 끝까지 사랑하겠노라고. 그러나 그 약속마저 점점 색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과연 그 약속은 누구를 향한 약속이었나. 결국 우리가 결별했는데, 넌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났는데, 떠난 널 두고 했던 약속이 과연 널 위한 약속이었나. 어쩌면 끝까지 널 놓고 싶지 않았던 내 욕심이, 내 자존심이, 차마 버리지 못한 나만의 약속이었던 건 아니었나. 그러자, 나는 아주 짙은 허무함에 휩싸였다. 그리고는 또 끊임없이 널 그리워하는 연습을 했다. 희미해진 네 얼굴을 떠올리고, 손가락으로 그려보고, 만져보았다. 마치 창틀이 튀기는 차가운 빗물을 만지는 것처럼. 형체도 알 수 없이 부서져버린 저, 빗물처럼.


 빗물을 만지는 와중에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그 기분을 깨닫는 순간, 나는 갑자기 몰아닥친 차가운 허무함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더는 눈물 따위도 나오지 않았다. 이젠 네 존재가, 내 눈물을 흘려낼 만큼의 가치도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널 그리워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걸 알면서도 나는 또, 널 그리워하는 연습을 했다. 속이 텅 비어서, 뭔가 허무하고 헛헛해서, 점점 아련해지는 네 이름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night overtime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