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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Aug 02. 2022

쉽게 부풀려지고, 또는 쉽게 부서지는 것들

 한밤 중 비가 내렸다. 세차게 쏟아지는 빗방울은 곧이어 창틀에 모나게 떨어졌다. 포물선을 이루며 구부러져 빗발치는 빗물을 보고, 천천히 창문을 닫았다.


 소나기가 내린다.

 이 짙은 어둠을 뚫고.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 소나기가 쏟아지는 열대야의 밤은 타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더욱더 조용했다. 새벽녘 소나기는 마치 인류가 살아있지 않은 멸망한 세상에 한줄기 희망처럼 내렸다. 이 빗물을 먹고 자란 새싹이 몸집을 키워 저들만의 숲을 생성할 것 같은 밤. 그 위대한 밤의 시작을 육신에서 튀어나온 영혼인 내가 고고하게 바라보는 밤.


 어쩌면 모두가 죽어있는 밤에, 나는 순간 어떤 이의 이름을 떠올린다. 그 이름이 나에게 잘 지내느냔 안부를 묻는 상상을 한다. 내 곁에 아무도 없는 밤에, 나 홀로 빗소리와 어둠에 잠겨있는 밤에. 그 목소리가 섬뜩하면서도 한 편으론 무척이나 기쁠 것 같다. 그저 그 목소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구석이 시리고 애틋해진다. 단지 그가 나에게 안부를 묻는 것만으로도.


 혼자만의 세상에서도 충분히 삶은 살 수 있었다. 눈물과 슬픔은 턱밑에서 출렁거리고, 때때로 너무 벅차 숨을 참아야만 했음에도. 혼자 있는 시간 동안 그의 이름을 떠올리며, 그 이름 없이도 사는 연습을 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는 늘 답답해하면서도 나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던 사람이었다. 결국 이해할 수 없어, 이것이 나의 온전한 모습임을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그에게는 그것이 꺾이지 않는 가치관, 나의 욕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욕심을 부린 적이 없었다. 나는 늘 무언가 손에서 놓아버리고 있었다. 밑바닥까지 내려가고 나서야, 나는 아주 높은 곳에서 날 바라보고 있는 그를 보았다. 그는 울부짖으며 나에게 손을 뻗었다. 나는 그 손을 잡을 수 없었다. 차마, 잡을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이 밝으면 똑같이 반복될 일상들. 나는 잠시 그 버거운 시간들을 피해 눈을 감아본다.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그리운 이의 이름은 더욱더 짙어진다. 그냥 때로는 모든 것들을 버리고서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렇게라도 내 삶의 짐을 덜어놓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 또한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짐이 될까 두려웠다. 이제 나에게 그는 휴식처가 되지 못했다. 단지, 그가 열망하는 것들을 이루지 못하게 훼방을 놓는, 나는 그에게 불필요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결국 버림받게 될까 봐, 상처받게 될까 봐, 무너지게 될까 봐 두려웠다. 사실은, 버림받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더 내려갈 수 있을까. 이 어두운 우울보다 더 짙은 세상이 있을까. 잔잔하게 깔린 우울의 밤에서는, 내가 죽는 상상을 끝으로 영혼만 남은 미지의 존재가 된다. 육신을 잃은 영혼이 된다면, 바라보는 시각도 조금 더 깊어질까.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이나 말랑말랑한 사랑 같은 것도 만져볼 수 있을까. 버림받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 믿음, 사랑 같은 것들도 자유롭게 생성하고 무너뜨릴 수 있을까. 내가 비로소 죽고 나면, 그러면 그런 것들이 세상에 남아 내 두 눈으로 또렷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될까. 내가 죽고 나면, 한결 가벼운 영혼이 되면.


 사랑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쉽게 부풀려지지만, 또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쉽게 부서지기도 한다. 그 연약하고 가녀린 감정에 의지해 한 사람을 온전히 믿을 용기가 나지 않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약속들, 종이에 새겨 넣은 한 장의 서류가 쉽게 쓰이고 파기되듯이. 그럼 지금 나의 마음이, 당신이 회피하고 있던 마음과 같은 것이 되는 걸까. 당신의 말대로 나는 정말, 당신을 온전히 믿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제는 내가 당신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게 되어버린 걸까.


 내가 눈앞에 형용하지 않는 것들로 실음 하고 있는 사이, 창밖에는 여전히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다.


 소나기가 내린다.

 이 짙은 어둠을 뚫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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