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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Sep 26. 2022

말랑말랑한 마음

 하루는 스트레스가 극심해서, 누군가에게 털어놓은 들 상한 감정이 회복될 것 같지 않았어. 짜증 나고 기분 나쁜 일 있을 때는, 무슨 의식처럼 눈을 감고 숨을 내뱉곤 했는데 그날은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지. 하루 종일 한숨을 푹푹 내쉬었지만, 늘 있던 습관뿐만은 아니었어. 심장이 두근거리고 머리가 아득해지는데, 내 안에 산소가 부족한 기분이 들었지. 그래서 거침없이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기를 반복했어. 그게 어쩌면 한숨처럼 들렸는지도 몰라. 난 단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았던 것뿐인데 말이야.


 의욕도, 열정도 한풀 꺾이고 나면 그래도 뭉근한 휴식기가 찾아올 줄 알았어. 사람들에겐 웃으며 슬럼프라고 말했지만, 사실 핑계였거든. 나의 지난 모든 슬럼프는, 휴식을 좀 더 달게 포장하는 말이었어. 그래야만 내 힘든 날들이 더 고단하게 느껴졌고, 나의 휴식도 좀 더 정당한 이유를 찾는 느낌이었거든.


 그런 날들을 양치기 소년 같은 거짓말이라고 한다면, 어쩌면 나는 진짜 슬럼프가 찾아왔을 때 쉬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그게 지금일지도 몰라. 내가 정말 힘들 때, 누군가 나에게 위로 한마디를 던졌을 때는 그게 무척 가볍게 느껴졌거든? 난 힘들어 죽겠는데, 힘내라는 말 한마디 따위가 날 구원해주지 못한다고 말이야.


 그래서 누군가의 위로, 따뜻한 말 한마디를 무시하며 살았어. 내가 말랑말랑하고 따뜻한 글을 써도, 에세이나 시집은 들여다보지도 않았지. 나는 점점 더 삭막해져 갔어. 나는 내가 시를 쓰면서도, 시인의 시를 이해하지 못했어. 그렇게 가슴은 점점 더 황폐해져 갔어. 감정이 격해진 글만 쓰면서, 나의 힘듦만이 진정한 고생이라고 생각했어. 타인의 아픔 따위 나에 빗대면 아무것도 아닐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엄살을 피웠던 거야.


 그런 어느 날은 있잖아. 내가 무척 힘들고 지치는 날이 있었어. 근데 그날은 오히려 난 내가 힘든 줄도 모르고 있었어. 그냥 그렇게, 하루를 무의미하게 흘려보내고 있었지. 어쩌면 내 인생 중 마음이 가장 말랑말랑해져 있을 때였을지도 몰라. 우연히 서점에서 에세이를 하나 골랐어. 에세이나 시집이라곤 들여다보지 않던 내가 말이야.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한 문장을 보고 눈물이 핑 돌고 말았어.


 ─ 괜찮아.


 그냥 그 한마디뿐이었거든.


 무미건조하게, 내 영혼이 어떻게 말라비틀어져가는지도 들여다보지 않았던 나는, 그때야 내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게 되었어. 어쩌면 내가 경멸하기도 했던, 아주 쉬운 그 한 마디를 보고 말이야. 나는 사실 내 모든 나날이 괜찮지 않았던 거야. 어떤 날은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았고, 왜 이렇게까지 꾸역꾸역 살아야 할까 의문만 가득했고, 그래서 어떤 날은 다음날 아침이 밝지 않았으면 했어. 모든 게 괜찮지 않았던 거야, 나의 매일매일은.


 서점에서 가슴이 뭉클해진 채로 한참 그 문장을 내려다보았어. 어느 책에서나 흔하게 등장할 그 한마디를 말이야. 사실 나는 강한 사람도, 마음이 단단한 사람도 아니었던 거야. 그 어느 때보다도 말랑말랑한 마음이었던 거지.


 우리가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말랑말랑한 마음일 때가 있어.

 그땐 나 자신이 나약하다고 스스로를 비난하기보다는,
그런 날도 있다고 생각해보는 거야.
 왜 난 이렇게 힘들어할까,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만 할까,라고 묻지 않는 거야.
괜찮지 않으면서 괜찮다고, 난 이겨낼 수 있다고 되뇌지 않는 거야.

괜찮지 않으면, 괜찮지 않은 채로 있어도 돼.

잠시 동안은 말랑말랑한 채로
위로라는 따뜻한 햇살을 쬐고 있어도 돼.

모든 순간,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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