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어딜 가나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었어요. 누구와도 싸우고 싶지 않고 물 흐르듯이 평화롭게 지내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내가 좀 더 숙이고, 내가 좀 더 작아지면 싸움이 없이 잔잔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진심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내 진심을 들은 선배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 생각 자체가 잘못된 거야. 모두에게나 좋은 사람으로 기억된다는 거, 그거 욕심 아냐? 너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싫어하는 사람도, 우습게 보는 사람도 있어. 모든 사람이 널 좋아하게 만들 순 없는 거야."
- 책 <그 순간 최선을 다했던 사람은 나였다> 중에서
20대의 나는 타인에게 늘 좋은 사람이고 싶었다. 그래서 타인의 비난에 상처를 받았고, 늘 나 자신이 부족한 탓이라고 자책했으며, 완벽주의 기질은 병적일 정도로 내 몸을 혹사시켰다. 타인과 함께 협력해서 일을 해야 할 때는 괜히 먼저 나서서 남이 하지 않는 번거롭고 힘든 일을 자처하기도 했다. 그렇게 하나, 둘 일을 받아오면서 싫은 내색조차 하지 못한 채, 묵묵히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일을 했다. 마음에는 뜨겁게 화가 쌓여가도 싫은 소리 하나 내뱉지 못했다. 단지 타인에게 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그런 어느 날, 평생 고쳐지지 않을 것 같던 나의 완벽주의 기질은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식기 시작했다. 30대에 들어설 즈음이었다. 단순히 '그토록 노력함에도 결국 상처를 받기 때문'은 아니었다. 상처를 넘어 이제는 더 이상 완벽주의로 살아가는 삶이 불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리라.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내가 일을 무척이나 많이 했고, 또 좋아했기 때문에, 그로 인한 번아웃이 온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나 또한 그런 종류의 번아웃인 줄 알았다.
살아오면서 의지와 번아웃이 바다의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쓸려나가기를 반복했지만, 나는 번아웃이 올 때마다 휴식을 취하면 괜찮아지곤 했다. 번아웃을 이겨내는 나만의 해결방법이었다. 휴식이 지겨워질 때 즈음, 또 걷잡을 수 없는 열의에 불타 새로운 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랬기에 이번의 번아웃 또한 짧은 휴식을 취하고 나면 회복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서른한 살의 번아웃은 달랐다. 회복이 되고 있나 싶을 정도로 무기력에 젖어있었고, 반복적인 일상에 정체되어 있었다. 어떤 때는 삶이 무척 버거워 무섭고 우울한 생각들을 하기도 했다. 열정에 불타올랐던 예전의 내 모습은 다 사라져 버린 것처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며칠 동안은 너무나 달라져버린 내 모습에 두렵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러다가 내가 그동안 쌓아 올렸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리면 어떡하지? 다시 활기찬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어떡하지? 밤마다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 내 모습에 자책하며 울었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명언 중에 이런 말이 있다.
20대는 의지, 30대는 기지, 40대는 판단이 지배한다.
30대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는 나는, 내가 지금 기지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번아웃이 지속되어 내가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겁이 났을 때, 예전처럼 활발하고 뜨겁게 의지를 불태울 수 있을까 걱정이 됐을 때, 이 문구는 지금의 나의 시기를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사람의 육체가 어느 정점을 기점으로 성장을 멈추고 닳아지기 시작하듯, 영혼도 마찬가지였다. 언제까지 건강하고 활활 불타오르는 의지가 있을 수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은 거스를 수 없었다. 마치 우리가 시간이라는 운명을 거스를 수 없듯이 말이다.
나는 20대의 불타올랐던 의지가 꺼져가는 중이었다. 완전히 불씨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았다. 기지의 영역에서의 30대는, 또 30대 만의 노련함이 있었다. 이제는 깨닫게 된 것이다. 열심히 살아도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있고, 때론 이상보다 더 명확하게 생각해야 하는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예전의 나의 의지의 뿌리는 이상이었다. 아주 먼 미래의 중장기적인 프로젝트를 꿈꿨다. 언젠가 꿈을 이룬 나는 반짝반짝 빛이 나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 그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밟고 지나가야 하는 현실의 가시밭길은 생각지 못했다. 정신적으로 버텨서는 이겨낼 수 없었다. 체력이 닳아지는 것, 먹고사는 현실적인 문제들까지 생각했어야만 했다. 삼십 대의 기지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단순이 이상만을 바라보고 좇아가는 의지가 아닌, 현실을 어느 정도 직시하고 그에 맞게 행동하는 것. 이상적인 것을 좇다가도 현실적인 문제가 다가왔을 때, 아무것도 몰라 우왕좌왕하는 것이 아닌 해결책을 즉각적으로 찾아가는 것. 그것만이 상처받지 않는 길이라는 것을 아니까. 이제 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으니까.
나의 삼십 대의 번아웃은 사람에 대한 상처가 아니었다. 완벽하고 싶다는 이상, 누군가에게는 멋진 커리어우먼처럼 혹은 대단한 작가처럼 비치고 싶었던 욕심. 그런 것들이 나 자신을 상처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나는 이제 타인에게 비치는 내 모습을 내려놓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는 이제 모든 상황에 상처받지 않기 위해, 그저 빛 좋은 개살구 같은 허울이 아닌 내실이 탄탄한 사람이 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뿐이라고. 이제 내 삶에는 더 이상 의지 따위는 필요 없었다. 이제는 그렇게 살아갈 힘조차, 나에게 남아있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변했다. 단지 내 안의 열정이 식었기 때문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 동안 세상이라는 파도에 부딪혀왔다. 아무것도 아닌 듯 보이는 파도가 바위를 깎듯, 우리의 의지도 마찬가지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의지는 꺾이는 것이 아닌 다른 형태로 천천히 변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 자신이 변화했음을 인정한다면 더 이상 지금의 내가 안쓰럽게 느껴지지 않을 테다.
그러니 지금의 변화에 서글퍼하지 말 것. 중요한 것은, 이런 변화에도 내가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가야 할지를 잊지 않는 것이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고, 신을 원망하게 된다면 지금 내 마음속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모습이 무엇인지를 떠올려보자. 정말 이것만큼은 놓고 싶지 않은 것 단 한 가지를 빼두고, 나머지 것들을 내려놓아보자. 그 내려놓은 것들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보자. 다시는 이런 짙은 번아웃의 수렁에 빠지지 않도록. 나는 그중에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과 ‘모든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 싶은 욕심’을 내려놓은 것이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만 챙기면 된다. 우선 내가 하고 싶은 것 한 가지를 계속하는 것이다.
삼십 대에 접어들어 번아웃이 오는 것은 당연하다. 병적인 우울감과 좌절도 마찬가지다. 번아웃이 왔다는 건, 그동안 열심히 달려왔다는 뜻일 테다.
그러니 이런 시기에는 늘 들던 채찍을 내려놓자.
그동안 정말 많이 고생했어.
세상 그 누구보다 따뜻하게 나를 안아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