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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Nov 12. 2022

어둠에서 세상으로

 내가 당신을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자각의 꽃이 피어날 때는, 오히려 세상이 척박한 땅이었을 때의 순간이었다. 삶은 내가 바라는 대로 일궈지지 않았다. 마치 내가 어떻게    없는 자연이 생리처럼, 자연이라는 이름의 인생은  멋대로 나를 쥐고 흔들었다. 그때 나는 주체적인 삶을 사는 방법을 잃어버려, 한동안 어둠 속에 방치되어  채로 지냈다. 문만 열면 바깥으로 나아갈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 세상에서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나에게 바깥으로 나가는 방법을 일러 주었다. 일어나 문만 열면 되는 일이라고,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치부해버렸다. 그런 설명이 계속될 때면, 나는 오히려 짙은 자괴감에 빠져 들었다. 나는 도무지 그 문을 열 힘이 남아있지 않은 걸, 나에겐 막중한 임무처럼 느껴지는 일을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쉽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남들이 쉽게 하는 일이라면, 어쩌면 나에게 결함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오히려 나의 약점과 빈틈만을 샅샅이 뒤졌다.


 어둠 속에 웅크린 채로, 나에 대한 문제점을 찾아다닐 때, 당신이 나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 주었다. 차디찬 어둠의 그림자 밑에 한참이나 숨어있던 나에게, 당신의 손길은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뜨겁고도 그리운 손이었다. 그러나 나는 눈물을 머금은 채로, 있는 힘껏 더 깊은 어둠으로 도망치려 했다. 안 그래도 부족한 나를 보며, 더는 실망하는 이가 없기를 바랐다. 특히나 당신이라면, 나에겐 더더욱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달아나려 할 때, 당신이 있는 힘껏 나를 끌어안아주었다.

 ─ 제발, 들어가지 마

 당신의 떨리는 목소리가 오히려 나를 뜨겁게 붙잡았다. 나를 사랑한다는 세상의 어떤 이들은, 오히려 나의 의기소침한 모습에 답답해하며 가슴만 쳤다. 나도 내 안의 문제점을 모르겠는데, 그들은 나의 세상을 전부 다 안다는 양 떠들어대기만 했다. 그런 나에게 이해의 손길과 포옹을 한 것은 당신이 처음이었다. 당신은 다소 울먹이는 목소리를 하며 내 등에 얼굴을 묻었다. 당신이 또 말했다. 제발, 더 깊이 들어가지 마.


 나는 그때야 당신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 있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내 등에 얼굴을 파묻은 당신을 내 가슴에 묻었다. 한참 당신을 끌어안고 울기만 했다. 나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원망,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얼룩진, 절규에 가까운 외침을 쏟아 내었다. 대체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며, 애꿎은 당신을 붙잡아 소리쳤다.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아무리 정답을 찾으려 해도 나의 텅 빈 구석밖에 보이지 않는데, 나에게서 대체 무엇을 얻어가려고 하는 것이냐고. 당신은 말없이 나를 안아 주었다. 어떻게 하라 일러주지도, 힐난하지도 않은 채.


 한참 당신에게 감정을 쏟아내고 나자, 나는 속에서 뜨겁게 밀려 나오는 새로운 감정을 느꼈다. 바로 부끄러움이었다. 당신 앞에서는 한없이 당찬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런 당신 앞에 나는 그저 연약한 존재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당신은 첨언하지 않고,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연약한 사람인들 어떻냐고, 난 그런 당신도 사랑한다고, 당신의 눈빛이 나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낮인지 밤인지 분간하지 못한 채로 며칠이 지났다. 당신이 나에게 방법을 일러준 것도 아닌데, 나는 스스로 바깥에 나갈 채비를 했다.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거리며, 외투를 챙기고, 안경을 쓰고, 머리를 단정하게 빗었다. 당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이렇게 주저앉아 있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빛에 익숙해지기 위해, 서랍에 감춰두었던 성냥을 꺼냈다. 성냥에 불을 붙이자, 그때야 어둠이 내린 나의 방이 보였다. 언젠가 열심히 무언가를 향해 달려 나갔던 내 지난날의 흔적들, 당신을 뜨겁게 사랑했던 어떤 순간들, 그리고 그런 흔적들 위에 뽀얗게 내려앉은 먼지까지. 가슴에 뜨거운 감격으로 가득 차, 나는 다시 한번 숨을 삼켰다. 이제는 정말 바깥을 향해 나아가야만 했다.


 커튼을 제치고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나 눈앞에는 붉은 단풍이 우거진 가을 가로수길이 펼쳐졌다. 타인들은 분주하게 거리를 오갔고, 청소부는 부지런히 바닥을 쓸고 있었다. 넉넉한 가을 햇살 아래, 나는 챙겨 입은 코트를 다시 천천히 벗었다. 세상은 생각보다 춥지도, 그렇다고 매우 뜨겁지도 않았다. 외투를 벗어 팔에 걸치자, 기다렸다는 듯 당신이 나타나 내 팔짱을 끼었다.

 ─ 같이 갈까?

 당신이 생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의 따뜻한 미소에, 얼어붙어 있던 긴장감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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