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희영 Jan 25. 2023

수평선



 새벽 내 바람이 불었다. 세찬 바람처럼 내 마음에도 바람 우는 소리가 들렸다. 짙은 그리움은 원망을 낳았고, 나는 그 마음을 바람 편에 흘려보냈다. 푸른 독이 묻은 그 마음을 네가 알리 없겠지만.

 대낮의 뜨거운 열기가 식은 새벽, 차가운 안개가 내렸다. 누군가 그랬지. 차가운 삶 속에 내린 사랑은 텅 비어 있다고. 현실에 부딪힌 사랑에서는, 이를 바득바득 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귀가 딱 맞물릴 것 같으면서도, 맞물리지 않는 그 소리들이, 쇳소리처럼 날카롭게 울렸다. 목구멍 밑에 찬 가래 끓는 소리가 갈그랑갈그랑 퍼지는 밤, 어둠 결에 눈을 뜬 나는 차가운 방바닥에서 있는 힘껏 몸을 웅크렸다. 사랑을 할 때는 온 세상이 따뜻한 봄인 것 같다가, 영원할 것 같은 그 사랑이 끝나던 날 감정은 수평선처럼 명확하게 갈라졌다. 그래서 가끔은, 이룰 수 없는 망상따윌 떠올리며 안개 낀 수평선을 상상하곤 했다. 그 흐릿한 바다에서는 어쩐지 이별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서.

 세상에 아름다운 이별 같은 건 없어서, 그래서 나는 너를 죽도록 원망하게 되었다. 바람 편에 흘려보낸, 날이 선 원망도 너에겐 귀찮은 지난 과거처럼 느껴질까. 언젠가 너의 소중한 존재였을 내가, 어느 순간 그저 지나쳐버려도 되는 바람이 될까 봐 나는 더 앙칼지게 널 할퀴고 싶어졌다. 아주 춥고, 매섭고, 냉랭한 그런 바람이 되는 꿈. 그래서 너의 그 부드러운 뺨과 귀를, 내 손바닥으로 있는 힘껏 내리친 것처럼 새빨갛게 만들어 놓을 수만 있다면.

 언젠가 네 옆에 들어찰 사람을 떠올리면 아주 밉고 고깝겠지만, 한참 뒤엔 이런 텅 빈 내 마음을 들여다볼 날이 오겠지. 그런 날이 언제쯤 나에게 찾아올까? 태연하게, 아무런 감정 없이. 아니, 어쩌면 전보다 더 너그럽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네가 할퀴고 간 상처를 만져볼 수 있는 날이, 나에게 찾아오기는 할까. 그런 순간에, 과거의 넌 나에게 어떤 모습일까. 활짝 웃는 모습이라도, 그 웃음을 비웃음이 아닌 아름다운 미소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될까?

 난 언제쯤 널 원망하지 않게 될까. 너를 미워하는 감정 속에 갇힌 난, 언제쯤 원망이라는 감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감정이란 수평선에 자욱한 안개가 걷히는 날, 찬란한 노을빛이 그 수평선을 더욱더 선명하게 만드는 날, 그날에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름다웠노라 회고할 수 있을까? 우리의 사랑을 아름다웠다고 떠올릴 날이, 내게 상처만 남기고 간 널 용서할 날이, 우리의 이별이 찬란했노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나에게 올까?


 새벽 내 바람이 불었다. 어느 야생 늑대의 울음소리처럼 우울하고 스산한 밤, 나는 이불 밑에서 내내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원망은 원망을 부풀려, 너를 있는 힘껏 미워했다. 그런 원망 속에서 내 삶에 더는, 봄날 같은 사랑은 없었다.

 그러다 문득, 어느 날 깨닫게 되겠지. 널 미워한 덕에, 어느 순간 널 증오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려서, 네가 내 인생의 마지막 사랑이 된 걸 안타깝게 여겨지게 될 날이. 오랜 시간 널 미워하면서, 내 마지막 사랑이었던 널 끝까지 지우지 않게 되었다는 걸. 증오로 가득 찬 마음에도 집착이라는 사랑이 피어있었음을. 아주 안타까운 마음으로 나를 다시 되찾게 되는 날이 언젠가는 올 거라고. 그때가 되면 비로소, 이불밑에서 바득바득 갈던 이도 더는 갈지 않게 된다는 걸, 나는 뒤늦게나마 완전히 깨닫게 되고 말겠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