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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Jan 26. 2023

한 여름밤의 꿈

《Call Me By Your Name》OST를 들으며


 엉겁결에 밀려든 파도라도, 네가 그런 마음이라면 나는 말없이 너에게 흘러갔을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던 넌, 나에게 사랑과는 다른 색깔이 있다고 했다. 그걸 뭐라고 말해야 할까. 나도 모르는 내 색깔을 넌 너무나도 쉽게 명명하곤 했다. 그러니까 그게, 넌 사랑과는 다른 색깔이야, 하지만 넌 내게 소중하지,라고.

 넌 언제나 돌아갈 곳이 있는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그곳은 내가 아니었다. 사랑도 아니고 우정도 아닌데,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고 진지하지도 않은 관계를 뭐라고 해야 할까. 그 여름밤, 우리가 밤새 몸을 섞고 일어난 새벽, 나는 불쑥 너에게 물었다.

 ─ 넌 우리가 다시 만나면, 오늘처럼 밤을 보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

 넌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그 대답을 하는 너는 어땠을까. 나는 한순간 내가 장난감이 된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그 말만은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아니, 우리 다시 친구로 돌아갈 수 있어, 난 널 친구로 생각해, 라거나. 아니라면 명확히,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더욱더 확실하게, 이제 앞으로 만나지 말자고 말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넌 언제나 그랬듯 애매한 말로 내게 말했다. 친구라거나, 연인이라거나, 그런 단어 따위로 정의할 수 없는 불투명한 말들을.

 언젠가는 널 진심으로 사랑했을까? 오히려 널 가볍게 사랑했더라면, 우린 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서로를 사무치게 사랑한다거나, 결혼을 한다거나, 한평생을 같이 살아간다거나, 그럴 수 없다는 걸 이미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으니까. 그저 널 친구로서만 좋아했다면, 그래도 우리 조금 더 오래 친구로 지낼 수 있었지 않았을까.

 귓가에 밀려드는 파도소리, 밤바다를 반짝이게 수놓은 달빛, 일렁이는 윤슬과 흰모래가 쓸리는 소리. 네가 땀이 차갑게 식은 가슴으로 나를 끌어 안으며 말했다.

 ─ 그래도 결혼은 너 같은 사람이랑 하고 싶은데 말이야. 네가 내 이상형이거든.

 나는 그 말에 또다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넌 오히려 우리의 관계를 흐려놓기만 했다. 너에게 난 뭐야? 턱밑에서 맴돌던 말은 상상 속에서만 수백 번, 수천번 튀어나왔다. 잘해보고 싶은 건지, 아니면 친구로 남고 싶은 건지. 넌 날 애정하는 듯 바라보다가도,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우정과 사랑을 분명히 하고 싶었다. 넌, 나의 상처를 매만져줄 생각은 없었고, 단지 멀리서 그저 어여쁘게만 보이는 나의 겉모습만을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나의 속은 푸르게 멍들고 물러가고 있는데도, 너는 끝까지 날 바라보기만 했다. 괜찮으냔, 겉으로만 그럴싸한 위로만을 던진 채.

 우리의 관계가 깨져버린 것을 두고, 온전히 네 탓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나 또한 너에게 그런 미적지근한 마음이었을 테니까. 뭐랄까, 우리 사이에는 뭔가 끈끈한 게 없었다. 단지 어린 날, 서로 꿈꾸는 열망이 비슷했다는 이유로, 그런 아주 얕은 동병상련 같은 마음으로 우리의 지난날들은 주욱 이어져 왔다. 누구 하나 먼저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않았다. 우정이라는 나무 뒤에서, 사랑이라는 그늘이 드리우고 있는지도 모른 채, 우린 그저 축축한 이끼를 온몸에 바르고만 있었다. 한때는 먼저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을, 누구라도 먼저 '만나자'고 말하고 싶었을, 우리의 축축한 욕망은 그렇게 썩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어떻게 지내야 할지도 몰랐다. 반갑게 주고받는 인사 뒤에는, 아쉬운 마음만 남았다. 언젠가 널 사랑했었던 것도 같은데, 그게 정말 사랑이었는지도 가물가물했다. 생을 살아가면서 가끔 네가 떠오를 때, 그날의 여름밤을 떠올리며 네 얼굴을 더듬어볼 테다. 맞지, 넌 이다지도 예뻤지. 허공에 두 손을 뻗고 더듬더듬, 널 추억하는 밤들이, 가끔은 있겠지. 담담히 널 추억할 수 있는 날이 다가오기를 바라면서 나는 또, 뜨거운 진심과 따끔거리는 열망이 가득했던 여름밤을 차분히 떠올릴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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