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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May 23. 2023

우리는 익사하지 않기 위해서,


 모두가 엎어져서 울고, 또 울고. 하루라도 울지 않으면 내일이라도 당장 죽을 것처럼, 모두가 울었다. 좌절의 형상은 저마다 달랐지만,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든 이들은 숨 막혀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밧줄이 턱밑을 조여올 때, 사람들은 다급하게 삶의 의미를 물었다. 가까운 내 사람에게, 부모에게, 신에게. 절대 털어놓지 못할 한 가지 비밀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나 자신이 죽음의 문턱까지 와서 절벽 아래로 뛰어내릴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숨 막혀했지만, 가까운 내 사람에게 털어놓지 못할 비밀을 품은 채 하루하루 고역스럽게 살아내었다. 사는 것 자체가 지옥인지라, 죽음 따위는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옹졸해서, 막상 죽음을 눈앞에 둔다면 마음가짐이 달라질 것을 알았다. 정말 죽기 직전이 되었을 때야 비로소 살고 싶게 되리라.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새벽 내 지긋지긋한 우울감에 몸살을 앓고 나면, 어떤 날은 이상하게도 처절하게 살아가고 싶었다. 오기에 바득바득 이를 갈며, 어떻게든 우울감에서 빠져나오고 싶어 안간힘을 썼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무언가를 보거나, 또는 먹거나, 또는 이불 위에 드러누워 천장만 바라보았다. 정말 나 스스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할까 봐, 문을 열면 낭떠러지로 이어질 그 문턱에 서서 물끄러미 발밑을 내려다볼까 봐, 그러다 뛰어내리게 될까 봐 불안에 떨며 말이다.

 우울감과 불안은 그렇게 순식간에 1년을 집어삼켰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시간은 무척이나 빨리 흘러갔다. 그렇게 나의 청춘이라는 한 시절이 아무 의미 없이 흘러가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 따위는 나에게 큰 걱정은 아니었다. 그저 시간이 흘러갔다는 사실보다는, 이 시간 끝에 무엇이 존재하고 있을까가 더 큰 문제였다. 나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고, 흘러가고 나면 어떻게 될 것이며,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람은 마치 죽기 위해 살아가는 것 같았다. 끊임없는 수행과 고통과 인내로 얻어낸 것이 무엇일지, 그리고 그것은 지금 당장의 죽음보다 값진 결말일지 늘 궁금했다. 나보다 먼저 몇십 년을 살아간 이들은, 이것 또한 삶이니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도 정확히 나에게 정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이 삶의 끝에 우리는 어떻게 되는지에 대하여.

 어떤 날은 나 스스로 목표를 정해 흘러가도 보았지만, 또 어떤 날엔 목표를 깨부수고 시간의 흐름에 영혼을 맡겨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 결과적으로는 모두 고통스러운 수행길이었다. 삶이란 부표를 잃어버린 채 바다 속을 유영하는 순간의 연속이 아닐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면, 또는 신이 나에게 어떻게 살라고 정해주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목표는 나 스스로가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었다.

 찬란하고 멋진 삶을 위해서 목표를 정하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목표에 욕심이 붙을 이유도 없었다. 단지, 정답 없이 흘러가는 인생에서, 목표만이 나의 온전한 안식처가 되었다. 바다 위에 둥둥 떠있는 부표에 잠시 기대어 숨을 고를 수 있듯이, 드넓은 바다라는 세상에서 수영하다 가끔 지칠 때면 목표에 나를 기대 보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하기 위해 삶을 살아가고 있고,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기 때문에 지금 당장은 쉬어도 괜찮다고. 그렇게 한다면 심해에 가라앉지도, 파도에 떠밀려가지도, 말라 죽을 때까지 헤엄치지도 않을 테니까. 욕심을 벗어던지고, 단지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스스로 알고 있다면, 목을 죄여오던 밧줄 앞에서도 여유가 생긴다. 어차피 나는 죽지 않을 거라는 걸, 나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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