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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Mar 06. 2024

단념


 단념하여 마음 편히 웃을 수도 없는 하루. 텅 빈 나의 세상에 남은 한 마디가 메아리처럼 맴돌았다. 다시는 얼굴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어스름한 새벽엔 그런 단념조차 금세 물렁거렸다. 어떤 이별은 사무친 그리움을 넘어 일그러진 욕망으로 들끓었다. 후회 없이 사랑하겠노라 맹세했던 날 밤, 내가 당신을 욕심낸 만큼 당신도 그만큼 내게 가까워졌다. 세상 사람들은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날 이해하지 못했지만, 오직 당신만은 괜찮다고 했다. 그런 마음인들 어떻냐고, 다들 흔들리며 사는 거라고, 인생은 어차피 단 한 번 사는 것 아니냐고…. 내 마음이 당신에게 기울어질 때마다, 나는 기한이 정해진 사랑을 두고 수도 없이 되뇌었다. 어차피 당신과 헤어지게 되면, 오늘날의 감정 따위 우리 모두에게 무뎌지게 될 거라고. 자신에게 기대라던 당신의 뜨거운 말도, 서리 낀 세상에서 서서히 온기를 잃게 될 거라고.

 한 번뿐인 인생이라는 말은 참으로 매혹적이다. 그 말이 마치 모든 실수와 잘못을 용서할 것만 같았다. 관대함의 틈은 작은 실수 하나를 용인하게 되면서부터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한 번만 더 볼까, 조금 더 볼까…. 그렇게 켜켜이 쌓인 시간이 수개월이 되어 갈 터였다. 애써 괜찮은 척 무덤덤하게 일상을 보내는 와중에도 마음엔 여전히 해일이 일었다. 나의 사랑은 언제나 잔잔하지만 치열했고, 그런 만큼 크게 뒤집어질 것만 같았다.

 엎어지거나 뒤집힐 수 있고, 온몸과 마음이 멍이 들더라도 이 감정을 내려놓지 못하는 건, 어쩌면 몸에 해로운 담배를 물고 있는 격 아닐까. 누구나 다들 끝내야 한다고 말하는 이 사랑을, 나는 도무지 놓지를 못하겠다. 온 마음이 병들어 밤새 눈물을 흘려도, 텅 빈 마음에 차가운 바람이 불어도, 어떤 사랑은 그렇게 욕심만 남아 내 목을 죄여왔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칼을 들고 잘라내거나 끊어내야만 하는 일. 커져버린 마음을 억눌러야만 하는 심정. 애석하다고 해야 할까, 사무치다고 해야 할까. 누군가 칼자루를 쥐어야 한다면, 그건 당신이 아니라 나여야 한다고, 그런 마음이 울컥 치밀어 오를 때마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느 날 우리가, 우리에게 기약된 이별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당신은 내가 먼저 우리의 사랑을 잊을 것이며,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거라고 말했다. 처음엔 그 말에 부인하고 싶었다. 내가 당신을 더 많이 사랑하고 있노라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 줄 모르고, 서로를 보듬는 손길에 취약해져 갈 때, 나는 문득 가슴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을 차렸다.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만큼이나 당신에게서 멀리 달아나야겠다고. 나로 인해 당신의 세상이 무너지게 두고 싶지 않았다. 그건 오직 당신의 삶과 시간, 인생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딱 맞는 퍼즐 같은 인생이 있다면 우리 삶은 살아가기 더 쉬웠을까. 그 한 조각이 비로소 사랑으로 채워질 수 있다면, 인생은 완벽하게 되는 걸까. 삶에 형태가 있다면, 나는 당신에게 어떤 조각일까. 꿈이 그저 헛된 희망임을 깨닫게 되자, 나의 세상은 텅 비어버렸다. 다시는 당신을 보지 않겠다고 약속한 날로부터, 나의 세상에는 한마디 말만 메아리처럼 퍼져나갔다. '한 번뿐인 인생, 다들 흔들리며 사는 거지.'

 단념하여 마음 편히 웃을 수도 없는 하루. 오늘도 내 가슴의 창에 찬바람이 불어온다. 나의 세상에 울려 퍼지는 메아리가 나의 단념을 한 번 매만지고 사라진다. 당신에게 연락을 하려다, 다시 또 입을 다물고 눈을 감는다. 오늘 나의 인내가, 당신의 세상에 작은 꽃 한 송이로 피어올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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