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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Jan 09. 2024

재회


 파리해진 사랑의 죽음을 예로 들자면 끝이 없었다. 인생이 젖은 낙엽처럼 땅 위를 지저분하게 휘날려도, 그것만은 제 나름대로 "낙엽"이라고 ─그러니까, "사랑"이라고─ 몸부림치는 것 같았다. 익숙해진 사랑의 테두리 안에서 자극적이고 새로운 맛을 찾는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변화를 꾀하며 이런저런 것들을 건드려보겠지만, 그건 새로운 것과는 다른 맛이었다. 익숙함은 그저 익숙함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작은 변화들이 아무 소용없는 짓이라는 뜻은 아니다. 아주 사소한 변화는 매우 다른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야 양쪽의 마음이 맞아 한 방향으로 나아갔을 때 말이다. 결국 사랑이 메말라 비틀어져버린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한쪽만 너무 극성이었거나, 혹은 무관심했거나. 한쪽만 매달리는 사랑을 두 사람 모두의 사랑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별이란 뻔한 결말을 애써 부인하고픈, 어떤 외로운 방랑자의 변명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헤어진 사랑을 지켜보며 다시 우리가 만날 수 있을까? 한 번은 빈자리에 대한 그리움으로 다른 이를 채워 넣어 보려 했다. 그 성급한 외로움이 다시 또 끊어진 인연을 연결하려 했다. 우리는 때로, 정말 "그 사람"이 그리워서 인지, 아니면 그저 "사람"이 그리워서인지를 되돌아보아야만 했다. 모종의 이유로 이별을 택한 경우, 다시 사랑하게 되었을 때 또 같은 사유로 상처 주거나 상처를 입게 되곤 했다.

 이 상태로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갈지 모르겠다. 오늘의 재회가 내일의 이별이 된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이전의 이별은 많은 상처를 남겼다. 사랑은 이제 점점 사랑으로서의 형태를 잃어갔다. 시간이 더 흘러서는 이 감정이 증오인지, 애정인지도 모를 테다. 내가 정말 이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지, 사랑해서 재회를 택했는지, 이 사랑을 끝까지 지켜낼 수 있을지도 확신이 안 설 테다. 수천번 긁힌 마음과 긁어 내린 감정이 뒤엉켜, 서운함을 넘어 배신감으로 치닫게 될 테다. 자기 연민에 빠져 결국 자신에 대한 실수와 반성은 흐릿해진 채, 한마디 말만 되풀이하게 될 테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어떤 결과를 맞닥뜨리느냐에 따라 사랑은 달리 보였다. 그저 아름다울 수도 있고, 혹은 다시는 열어보고 싶지 않은 상자 같은 것이 될 수도 있다. 끝을 생각하면, 우리의 지난 사랑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우리에게 지난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을까? 단지 한 가지 희망을 품어보자면, 그저 아름답고 소중한 사랑이었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런 사랑이 있다면, 더더욱 재회를 해서는 안될 테다. 아주 소중한 기억이 빛을 바라, 그 색을 잃게 되면 안 되니까. 기억 속에 담은 사랑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푸르고 웅장해질 것이다. 애정에 대한 갈망과 탐욕으로, 그 아름다움을 훼손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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