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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노트 Jan 12. 2022

비행 스케줄


“비행 스케줄이 예약되었습니다”



-  문자를 받고 급하게 비행에 필요한 장비들을 서둘러 가방에 집어넣고 집을 나섰다. 플로리다의 변덕스러운 날씨 덕분에 비행을 못하고 집에서 기다린 지 일주일. 이 시점에서 아주 반가운 연락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공부가 손에 잡힐리는 만무했고 대신 침대에 누워 날씨 어플로 기상예보를 주기적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비행 스케줄이 잡힌 오늘도 여전히 먹구름이 낮게 깔려있었다.


  비행 장비를 이것저것 챙겨 집을 나섰다. 학교로 가는 길, 이젠 비행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바닥이 났다. 기다리는 동안 스케줄이 안 잡힌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안 잡혔다면 맘이 편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 도착해서 취소되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았다.   


  날씨가 화창해서 비행할 수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학교에 도착하면 갑자기 비가 오질 않나, 예보에는 기상이 좋다고 했는데 밖은 보란 듯 천둥번개와 비를 뿌려 대고 있지를 않나,  그중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모든 비행 준비까지 마치고 조종 석안에 앉아 시동을 걸려고 하는 순간 저 멀리서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을 볼 때였다. 그러면 함께 있던 교관에 나지막한 한마디로 그날 스케줄은 끝났다. “Oh, S**t”


플로리다는 온대 기후의 전형적인 특징을 띈 지역이다. 찌는 듯한 더위가 낮부터 지속되고 하루 중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길게 15분에서 30분 정도 오다 그치길 반복했다. 보통 학교에서 집까지 30분 정도 걸렸는데 출발할 때 하늘에는 낮게 먹구름이 깔리고 천둥을 동반한 폭우를 쏟아내다 집에 도착할 때쯤 맑은 하늘과 함께 그쳤다. 우리는 이것을 뇌우(Thunderdtorm; TS)라고 부르며 이른 8월부터 11월에 가장 비 번하게 나타났다. 


  얼마나 빈번하면 플로리다 올랜도에는 디즈니랜드와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있는데 여길 다녀온 유투버들이 말하는 필수품 중에 우비가 항상 포함되어 있을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뇌우가 가장 많이 있는 9월에 지금, 나를 포함한 모든 학생이 집안에서 하늘만 바라보며 비가 그치는 것을 바라고 있다. 하루라도 빨리 비행을 마치고 귀국하는 게 비용을 절약하는 유일한 방법인 우리들에게 플로리다의 날씨는 지금 원망에 대상이었다.  


  30분 정도 걸려 학교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브리핑 룸으로 가는 동안 하늘에는 여전히 구름이 두껍고도 낮게 깔려있다. 가끔 뇌우가 있을 때는 어둡고 두꺼운 구름이 파도처럼 빠른 속도로 하늘을 지나간다. 언젠가 그 구름을 가만히 서서 보고 있던 적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버티고 서있었다. 나에게 다가오는 것 만으로 이미 난 압도당했고 내 머리 위를 지나가는 구름에 삼켜져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러니 비행이 취소되는 건 당연했다. 


제이 날씨 봤지?, 우리 못 갈 거 같아

우리 비행하는 쪽에는 구름 없지 않아?

그래도 학교 규정에 맞지 않아서 안..

OK, I got it.


교관에 말을 단숨에 자르고 가방을 챙겨 나와 차에 시동을 걸고 집으로 향했다. 그동안 참았던 답답함이 터져버렸다. 내 교관은 미군 출신으로 원리와 원칙을 아주 중요시했다. 그런 그에게 오늘과 같은 날씨에 비행을 한다는 건 물어보나 마나 한 질문이었다. 그런 그의 대답은 기다림에 곪았던 내 마음을 터뜨렸다. 


  나도 비행을 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오래 기다려왔기에 아쉬움이 컸다. 안전을 위해 규정을 꼭 지키는 것은 조종사로서 아주 중요한 자질이고 꼭 배워야 하는 모습인 것도 알지만 그날만큼은 속상한걸 숨길수 없었다. 


아까의 행동에 미안하다는 문자는 남기고 집으로 향하는 길, 신호를 받고 정차해 저 멀리 노을이 지는 것을 바라봤다. 이제 막 구름이 걷히고 파란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날씨 타이밍 한번 끝내준다. 허탈함을 받아 그때 받아들인 그때 전송된 교관에 문자와 함께 신호가 바뀌었다.


"나도 너만큼 비행을 좋아하기 때문에 너만 이해해, 비행하지 못해 너무 아쉬워."


  비행하면서 많은 걸 배우는데 그중 한 가지는 아무리 계획을 세운다 하더라도 그건 그저 계획에 불가하다는 것이다. 또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 생각해보면 어떤 계획도 내가 생각한 방향으로만 흘러가지는 않았다. 내 담당 교관이 먼저 배운건 비행만은 아닐 것이다. 앞으로 이 일을 직업으로 하기까지 얼마나 더 많은 시간과 상황을 기다려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이래서 인내심도 실력이라고 하나 싶었다.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는 자연의 섭리와 그 앞에 한 없이 작은 인간, 또 그 섭리를 따라야만 하는 직업, 조종사. 선택에 후회는 없지만 과정이 쉽지 않아 버티는 중이다. 


  몸도 마음도 축 처진 밤, 이대로 잠들긴 너무 아쉬워 집 가는 길에 퍼블릭스에 차를 세웠다. 이 근처 있는 치킨집은 다 돌아봤지만 여기만큼 한국 치킨과 비슷한 곳은 없었다. 기다림에 지치거나 하루를 그냥 보내기 아쉬울 때마다 여기서 치킨에 맥주 몇 병을 사러 왔다. 도대체 난 여기서 치킨 몇 마리를 더 뜯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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