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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노트 Jan 26. 2022

서른에 새로운 도전이 가능했던 이유 3

결단과 실행



 - 유독 초등학교에서 꿈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던  같다.  학년에 올라갈 때마다 만난 선생님들은 우리에게 한결같이 종이에 꿈을 쓰고 발표를 자주 시키셨다. 남자 친구들은 주로 경찰관, 소방관, . 검사였던  같고 여자 친구들은 선생님, 피아니스트와 같은 직업이 가장 많았는데 그중 대통령이 꿈인 친구들도  명씩  있었다. 기억으론  반에 30~40 되는 친구들 사이에서 튀어 보이고 싶은 마음이 특히 많은 친구들이었는데 수업시간 선생님 말씀 중간에 웃긴 말로 친구들을 재밌게 하곤 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꿈은 대부분 부모님의 영향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어릴  이루지 못한 부모님의  혹은 이것저것 배우다 보면서 재능이 있다는 선생님에 말이 고스란히 우리의 꿈이 되었다. 예외 책을 많이 보시는 부모님의 영향을 받은 친구들은 학교에서도 책을 많이 보고 성적도 좋았으며 학자나 교수를 꿈꿨다. 그렇게 적은  종이를 우린 1년간 캐비닛에 붙여 놓고 서로 것을 보며 놀리기도 하고 속으로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땐 종이에 쓰인  꿈이 정말 이루거  것만 같았다. 어느 날은 좋아하는 친구가 생기면 캐비닛에 적힌 꿈을 보고 좋아할 법한 것들을 사주기도 했다. 점차 시간이 흘러 우리는 서로의 성품과 성향을 알아갔고 그들의 캐비닛을  때마다  꿈을 이룰만한 애인지 아닌지 추측할  있었다. 그렇게 우린 다음 학년으로 올라가 똑같은 질문을 받고 답을 써냈었다. 6 동안 꿈에 대해 발표하는 우리는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꿈은 모두 직업이었다.



그렇게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며 우리는 성적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가치가 점수로서 정해지는 실을 마주한 우리는 등급으로 분류되었고 그걸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우린 배운 대로  방향만 바라보며 뛰었고 이른바 ‘좋은 대학교 가지 않으면 인생에 패배자가 된다는 어른들의 ‘말씀’에 우리는 암묵적으로 동의했. 어른들의 말은 틀리지 않다는 인식을 가진 우리는 안타깝게도 의심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나의 의견을 내세우기보다 모두가 가는 방향을  빨리 가는 법을 배웠다. 그러다 보니 내가 누구인가와 같은 질문은 쓸모없으며  문제라도  맞히는 방법에 집중했다. 그렇게 정규과정을 모두 마친 우리는 대학에 입학해 드디어 자유라는 생각에 주어진 시간을 만끽하고 즐겼다. 그렇게 자유를 즐기고 있을 때쯤 남자 친구들은 한두 명씩 입대한 사이 여자 친구들은 졸업을 하며 사회에 뿌려졌다. 각자에 일을 하며 한해  해를 보내는 우리는 스스로를 잊은  사회와  집단에 머물러 적응하며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고 했다.  중엔 퇴사하고 잃어버린  자신을 찾기 위해 여행을 다니는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돈이 떨어지면 또다시 회사 속으로 들어가거나 각자 결심한 꿈을 향해 달려갔다.  과정에서 우리는 진리처럼 믿었던 어른들의  대부분 오류 투성이며 오히려 어른이 될수록  불안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고민도 이쯤에서 출발했다. 소위 가장 좋은 학교는 아니었지만 나름 이름 있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까지 졸업했지만 여전히 미래를 생각할 때 불안했다. 내가 무엇을 잘하고 좋아하는지 생각해 본 게 얼마 되지 않아서 내가 누구인지 조차 몰랐다. 그 와중에 딱 한 가지 확실했던 것은 돈 벌기 위해 적합한 스펙을 가진 부품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고민을 거듭한 결과 ‘뭘 해서 먹고살아야 하나’에 대한 대답은‘나 답게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지금껏 들어왔던 어른들의 말보다 내 마음의 소리를 더 듣고 싶었고 이 마음을 끝까지 지켜내고 싶었다. 그렇게 나에게 귀 기울이며 하나씩 나에 대해서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먼저 난 영어를 좋아하고 미국에서 공부하고 싶었으며 이를 통해 평생 써먹을 수 있는 기술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까지 알아냈다. 몇 번이고 되 물어봤지만 이 세 가지는 확고했다. 곧바로 이를 실행할 방법을 알아보다 30대에 짐 싸들고 미국에서 살고 있는 형이 생각났다. 그 순간 바로 인스타 DM을 보냈다.



“형 오랜만이에요!! 어떻게 지내세요?”

"2년 정도 엘에이에서 일하다 다음 주에 모은 돈으로 비행하러 갈 거야!"

“저도 비행 생각만 해본 적 있어요.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세요?”



이후 형은 지금껏 연고 없는 미국에 혼자서 2 동안 지냈던 일들과 파일럿이 되기 위한 교육 일정과 비용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셨다. 처음 비행을 하는 입장에서  필요한 정보들도 많이 있었지만 그것보다 형의 이야기 중간중간 묻어있는 본인의 길을 향한 믿음과 확신에  말투가 마음을 사로잡았다. 한국에서 시작했다면 주변에서 분명히 늦었다고 이야기할  있는 32살에 비행에 도전한 마음과 파일럿이란 직업을 바라보는 자부심 넘치는 시선. 그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산다면 분명 나답게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화를 마치고 파일럿이라는 직업에 대해 관심이 생기며  일이라면 평생 써먹을  있는 기술이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미래가 보장된 길도 아니었고  단위 돈이 투자가 되어야만 했으며 이방면으로 이른바 취업을 도와줄  있는 인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마음속으로 조종사로 살아야겠다는 확신이 생긴 이상 부정적인 이유에 장단을 맞출 시간이 없었다.   미국에 있는 비행학교와 연결을 시켜주는 여러 업체들을 찾아다니고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달 후,  미국에서 비행교육과정을 받을 수 있게 도와주는  교육원에 입과 하게 되었다. 그곳에선 미국 비행학교에서  적응할 수 있게 출국  2달간 지상교육을 진행했다. 2019 12 추웠던 겨울, 그렇게 교육원과 집을 오가며 비행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쌓았다. 지금까지 했던 모든 과목을 통틀어 가장 열심히 그리고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아 공부했다. 늦은 밤까지 공부하다 문득문득 시계를 볼 때면 마음에 확신에서 나오는 열정의 힘이 실로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화가 나 작곡가들이 해 뜨는 줄 모르고 자기 작품에 빠져 연구하게 하는 힘을 비슷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나인 투 식스로 진행된 수업은 그렇게 마무리가 되고 이후 계속 공부하는 동안 점점 출국 날짜는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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