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청년이 되어있었다. 청소년 시절의 얼굴이 떠올랐다. 청년이 된 지금과 청소년 시절 그리고 어린이였던 얼굴이 지층 단면에 나타나는 무늬를 보듯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달라진 부분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달라지지 않은 부분을 찾고 있는 나. 달라졌다는 것과 변했다는 것은 비슷한 의미일 터, 그 부분을 알아채거나 그 무엇을 가늠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노력하지 않아도 알거나 느끼게 되는 것이니까.
그녀와 그동안 지낸 이야기를 가볍게 나눌 때, 눈길을 머물게 하는 그녀의 눈동자. 알 것 같았다. 어딘가 촉촉한 느낌, 습기가 머무는 듯, 그녀가 짓는 표정에서 선의가 가득한 모습이 그대로라는 것을. 다소 신경질적인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오히려 선뜻 손을 내밀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편안한 이미지. 사라질 수 없는 개인의 깊은 곳에서 살아있는 정체성.
한유한 자리로 옮겨 그동안 지낸 이야기를 나누었다. 퐁당퐁당 물에 던져진 돌덩이 파문처럼, 이야기는 뚝뚝 끊어지다 소리 없이 이어졌다. 바다가 캠퍼스인 해양대학교 학생이라고 말하고는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 하하하,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간절했던 한 생명이 태어나 성인이 되어, 우연히 마주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어두운 영혼이 깃든 세계에도 흥겨운 축제가 열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라는 다소 엉뚱한 이야기. 어쩌면, 한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 같은 초인적 시간 말이다. 특히 청소년 시기를 지난다는 것은 방향 감각이 부족한 상황에서 탈출을 모색하는 시기가 아니던가. 그녀를 만나보니, 그녀가 보낸 유난했던 사춘기 행적은 반명 반암 세계에서 흔히 강종강종하게 나타나는 신호였음을 알 것 같다.
그녀는 바다를 다니며 보고 들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해양경찰이 되고 싶어 지원했지만, 바다에서 할 일이 다양하다는 것을 알고는 어떤 분야가 적성에 맞는지는 조심조심 생각 중이라 했다. 입학한 여학생은 몇 명이 안 되지만, 남녀 구분 없는 일상에 적응 중이라고 했다. 특성상 남성이 많은 단체 생활에 어려움이 있지만, 군인으로서 가져야 할 통합 의식에서 생각하면 별문제가 아니라며 눈을 깜박였다. 부스럭거렸던 감정이 성인이 되면서 자리를 찾게 되었다며, 제단에 머리를 조아리며 염원했던 어른들 마음을 알 것 같다고 말했다. 성장하면서 투정 부렸던 일들이 모두 기억나는 것은 아니지만, 기억이 날 때마다 부끄럽다면서 또 소리 내어 웃었다. 회오리 같은 사춘기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그녀와 나는 알고 있으니, 웃음이 지난날에 대한 회복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관대해질 수 없는 현실과 가끔 변명해야 하는 순간이 싫었다. 대학 진학을 대비해 반강제적인 학업 구조로 점철된 일상을 박차고 다른 일상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간살스러운 일상의 호의를 구별하지 못했음을 알게 되었다. 무심한 일상에 달음박질하며 도달했지만, 그리 경쾌하지 않았다. 자기 연민으로 뛰어들었던 일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지루했다. 지루함은 새로움을 찾았고 새로움은 참을성과 올바른 태도를 생각하게 했다. 문학으로 향한 열망도 있었지만, 고개를 흔들었다. 구체적인 것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열중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다가 만난 것이 바다였다. 바다로 향한 시선, 광활한 대양에서 터져 나오는 에너지, 추위와 허기짐(신체적, 정신적)조차 자의식으로 내면화할 수 있는 바다가 좋았다. 바다를 향한 열정이 충만하게 꿈틀거렸다. 놓쳤던 시간만큼 더 열심히 공부했고 드디어 원하는 대학생이 되었다.
- 일 년 동안 선상에서 보내는 것이 한 해 실습과제지만, 코로나 사태로 우리나라 섬을 다녀요. 여러 나라를 다니는 기회는 유보됐지만 선상생활 체험은 삶을 극대화하는 순간이라 생각해요. 어느 시기에 과거를 회상할 때 지금 경험이 삶을 완결해 나가는데 풍부한 이미지가 되어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해요. 가끔 무서움과 공포에 마주한다 해도 가라앉아 있던 마음 중심에서 생성하는 소리를 듣고 싶어요. 어린 시절, 그네 타다가 떨어져 울었던 기억이 공포심이라 해도 바다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한한 힘으로 몰아내고 싶고 지금도 진행 중이지요. 통쾌함으로 치환할 수 있는 정신을 다듬고 싶어요.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얼마나 정돈되었던지.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의 미래를 생각하고 내 미래를 생각했다. 과거를 회상하며 현재를 계획하듯이 미래에 청사진이 될 수 있는 현재의 삶을 생각하며 내 가슴을 끌어안았다. 모든 것이 균형 잃고 흔들릴 때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어떻게 중심을 잡아야 하는지를 그녀가 경험하고 있는 바다 이야기를 들으며 현실 감각을 헤아렸다. 많은 이의 소망이었던 어린 생명체가 성인이 되어 자기 소망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다. 그 방법은 숭앙하는 의식이 되어 우뚝한 주체를 보듬는다.
신경이 바늘 끝에 매달린 것처럼 날카로운 시절이 있지 않은가. 귀에 익숙한 기침 소리에 불덩이처럼 화가 치밀어 오르던 경험이 있지 않은가. 노릿한 기운이 문틈으로 들어올 때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복받치던 울음을 토해낸 적이 있지 않은가. 인생을 둘러싼 모든 요소가 짜증 나던 적이 있지 않은가. 기름진 음식이 식욕을 돋기는커녕 위를 뒤틀리게 하던 사연이 있지 않은가. 잔잔한 바다가 포효하는 태풍으로 변하듯이, 찰랑이는 파도가 쓰나미 되는 삶이 있지 않은가. 피해를 줄이기 위해 안전에 힘을 기울이는 것처럼,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은가. 태풍이 지나가면, 바다는 잔잔하고 파도 소리도 다정해지는 것처럼, 삶도 그렇지 않겠는가.
바다는 보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감정을 불러 모은다. 무해한 사람에게 미안해지고 소망이 없었던 일이 희망이 되고 잃어버렸던 기억이 되살아나며 방향 없는 생각에 몰두해도 어딘가에 이르는 곳에서 다시 시작하게 하는 신묘함이 있다. 그러다 망망한 바다 한가운데에서 황망한 생각으로 죽은 자의 혼이 다가올 때, 깊은 생각에 빠지곤 한다. 그들이 속삭이는 혼란스러운 형상들이 어쩌면 가장 신화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다만큼 신화적 장소가 또 있을까. 생과 사가 솟아나고 사멸하는 신성한 곳이 바다라는 의식은 혼란스러운 현실에서도 살아볼 만한 가치를 헤아리게 한다.
새 생명에서 아이라는 용어로 불리는 기간은 얼마 동안일까. 또 아이가 어른이 되어 성인이 되는 기간은 얼마의 시간이 지나야 할까. 물리적 시간뿐만 아니라 심리적 시간이 지나 성인이 되어 만난 그녀에게서 바다 냄새가 난다. 그녀에게서 느꼈던 촉촉한 느낌이 바다 물결이었나 보다. 흥미를 느끼고 개인 취향이 생기면서 소망하는 것들이 추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는 듯하다. 웃는 것만으로도 존재감이 빛났던 그녀의 이름. 그것은 찬란함이었다. 자기 삶을 책임감으로만 느끼지 않는 빛이었고 사방으로 번지는 기운은 바다만큼 넓고 강했다.
그녀에게서 바닷소리가 들리고 바다 냄새가 나는 듯하다. 바다가 품었던 소리로 다가오는 냄새. 파도를 타고 넘실대며 달려오는 냄새는 바다 일상을 말한다. 종종, 웃음이 나는 일상 말이다. 꿈만 꾸는 것이 아닌 눈에 뚜렷이 보이는 사실이 가득한 현실에서 하하하, 웃는 웃음. 붉은빛을 내뿜는 태양을 품고 토해내는 바다에서 그녀는 명료하게 자기를 바라볼 것이다. 그 눈으로 바라본 세상을 어떤 형용할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해 고백할 날을, 또렷한 음성으로 전해 줄 날을 기다린다. 바다에서 깨닫게 되어 홀로 간직했던 이야기를 기다릴 것이다. 다소 긴 시간이 걸린다 해도 바다 특징이 가득한 소리를 상상한다면 견딜만하지 않을까.
코로나 위험이 과거가 되었듯이, 과거가 현재를 이끌듯이, 그녀의 과거는 삶의 바다를 유영하며 현재를 응원할 것이다. 오대양 꿈같은 현실은 웃음이 되어 그녀의 이야기를 풍성하게 할 것이다. 이 시대 청년으로 살아가는 그녀는 푸른 바다 이야기에 귀 기울일 것이다. 바다를 구성하고 있는 가치를 한 움큼 담아 올 그녀, 새파란 청춘. 낯설고 차가운 상황마저도 바다에서 찾아낸 역동성으로, 바다가 지닌 다양성으로 매끄럽고 윤택한 삶을 만들 것이다. 아직 경험하지 않은, 막막하고 아득하게 느껴지는 상황에서도 웃음이 감탄으로 터질 것이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