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렁출렁

by 남쪽맑은물

긴긴 다리 위에 저녁해 걸릴 때면/강물은 긴 허리 앓으며/말없이 흘러가네//

긴긴 다리 위에 저녁해 걸릴 때면/텅 빈 저녁 기차/혼자서 달려가네//

긴긴 다리 위에 저녁해 걸릴 때면/기다란 내 그림자/혼자서 달려가네//

(조동진 노래, 「긴긴 다리 위에 저녁해 걸릴 때면」)

며칠째 입에 맴도는 노래다. 저녁해가 걸린다는 노랫말이, 혼자 달려가는 텅 빈 기차 영상이 어찌나 그리움을 불러내는지. 파란 하늘도 저녁이 되면 해가 기울고 달을 불러내면서 붉어진다. 그것도 긴긴 다리 위에 걸린 저녁해라니. 그 해는 집으로 가는 사람들에게 기다란 그림자를 내주면서 등을 토닥인다. 그림자는 꿈과 현실을 내면으로 은은하게 스며들게 한다. 마치 소리 없이 퍼지는 소문처럼, 친밀함을 빙자한 소름 돋는 시선조차도 스르르 사라지게 한다.


기차가 지나가는 철로를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오는 그녀의 아버지는 가족에게 걱정이었다. 어두워질수록 만취 상태로 집에 오는 날이 많기 때문이다. 그 시간은 저녁해가 이미 사라지고 초저녁별이 슬슬 자리를 잡고도 꽤 시간이 지난 어두운 밤이기에 더욱 그랬다. 우러르기 좋은 달이 밤으로 달려가는 기차를 비추는 시간에 아버지는 철길을 건넜다. 나름대로 질서를 지키며 존재하는 침목 몸통을 밟으며 마음이 밟히는 현실을 잊고 싶었는지, 부서지며 사라지는 관념으로 보였던 현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자잘하게 찢어지는 현실을 목도하는 것이 더 두려웠는지, 아버지는 술 마시는 날이 점점 늘어갔다. 기찻길 건너 듬성듬성 서 있는 가로등이 아버지를 비추었고 늪 같이 깊숙하게 흔들리는 그림자를 만들었다.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오는 길이 참으로 더디고 더디었던 날들.

아버지는, 그녀의 아버지는 발걸음을 멈추고 기억을 멈추고 두려움을 멈추고 싶었다. 찢어진 현실에서 더 나은 무언가가 되기 위해 용기를 내고 싶었다. 불안한 어제를 멈추고 넋두리 가득한 오늘을 멈추며 다시 한 발 내딛기 위해 절대적 가치를 찾고 싶었다. 그러나 두 걸음 앞으로 갔다가 한 걸음 뒤로 가기를 반복하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아버지에게는 소망이 되지 못했다. 이미 현실은 신성한 이야기를 뭉개버렸다. 미진한 삶이, 숨바꼭질하며 꼬리를 감추고 있는 허상이 그림자로 보이는 삶이었다. 그러니 허청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굼뜰 수밖에.

저녁 해 걸린 시간부터 깊은 밤까지, 술은 아버지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술은 현실을 정지시켜 버렸고 현실 너머의 다른 세계로 아버지를 데리고 갔다. 기찻길을 건너야 올 수 있는 집으로 이사하고는 자기의 무력감에 빠져 아버지는 술을 더 찾았고 술은 아버지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술을 찾기 위해 무력감이라는 자기 한탄을 데리고 다녔는지도 모른다. 술과 무력감은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독창성을 잃는 행동인 줄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술은 멈출 수 없는 연민이기도 하니까. 그것은 단단하게 붙들고 있는 아버지의 열망, 예를 들면, 아버지가 짓는 좋은 웃음과 아버지가 부르는 매끄러운 노랫가락,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며 한쪽으로 기우는 고개와 하늘 저편 구름 모양을 묘사하는 언어, 매끈한 빨래판을 만들기 위해 대패로 나무를 매만지던 아버지의 손과 쑥스러운 표정을 감추기 위해 더욱 커지는 아버지의 눈동자를 점점 사라지게 했다. 자꾸만 세상에서 흩어지고 있는 자기가 두려워 아버지는 술을 마셨다.

출렁다리 중간지점에서 중년 남자가 다리를 심하게 흔든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진동이 즐거움을 주는 모양이다. 무서워하며 마주 오는 사람들 얼굴을 보며 마냥 좋아한다. 해안 절벽을 지나는 다리는 생각보다 어질머리나도록 심한 진동으로 출렁거린다. 일행이 남자를 저지한다. 그러나 남자는 서름서름하게 웃으며 계속 다리를 흔든다. 조각공원과 산책로로 이어져 바다를 횡단하는 출렁다리에서 동그란 남자 얼굴에 노을이 번진다. 이미 술을 마셨을지 모를 남자. 누군가 크게 소리 지르며 저지하는 소리에 남자는 여전히 웃고 있는데…, 그 웃음이 파도에 묻힌다. 웃는지 우는지 묘한 얼굴. 맑고 투명한 날씨와 전혀 상관없다는 얼굴이다.

흔들리는 다리가 가라앉기를 기다린다. 다리 아래로 푸른 바다를 쳐다본다. 남자는 흥미를 잃었는지, 미안한지 웃는 얼굴이 시들해지면서 허전거리는 걸음을 옮긴다. 흔들리는 몸, 주억거리는 고개, 밧줄 잡고 있는 손. 호기를 부려 보았지만, 세상살이가 그 호기를 받아줄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몸이, 특히, 굵은 밧줄을 잡고 있는 손이 알고 있는 듯하다. 손등에 도드라진 힘줄이 노선을 나타내는 거미줄 같은 지도처럼 울퉁불퉁하다.

남자는 밧줄이 생명줄인 꼭 잡고 자꾸 뒤를 돌아보며 다리를 건너간다. 그 모습이 어정어정하다. 다른 이들이 당황하고 무서워하는 모습이 시들해졌는지, 동글동글하다 일그러지기를 반복하던 웃음이 남자 얼굴에서 사라진다. 밧줄 잡고 천천히 사람을 스쳐 지나가면서 뒤를 돌아보았던 얼굴이, 다리를 건너며 흔들리는 남자 뒷모습이 바다를 배경으로 정지화면처럼 보이다 바다색으로 초기화된다. 버르적거리는 발걸음이 일렁이는 파도에 휘청한다. 그동안 출렁거리게 했던 가칠가칠한 기억을 털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옹색한 웃음이 새빨간 거짓말 같다. 남자 웃음에 울음이 섞여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바다를 향해 웃음을 던졌지만, 엉엉 울고 싶은 마음을 어쩌지 못하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녀의 아버지는 혼자 훠이훠이 밤길을 걸어오며 지난날들이 일장춘몽이라 생각했을까. 생각은 춤을 추고 목울대는 그르렁거리고 맑게 일렁거리는 가족 눈동자를 잊을 수 없어 술기운으로 걸어왔던 기찻길. 날림으로 지어진, 건물 벽에 듬성듬성 금이 간 연립주택. 주변에 아무렇게 방치된 건축 자재가 일그러진 모습이 가로등 불빛으로도 선명하게 보이던, 더구나 확대된 그림자로 다가오는 비참한 현실을 응시해야 했던 아버지는 세상이 깊고 깊은 심해라 생각했을까. 그 심연 앞에 서는 일만 남아 있을 때, 텅 빈 심연에서 건져낼 대답이 마땅치 않을 때, 마치 지나친 고요가 이상한 막막함과 다르지 않은 기묘함은 아니었을까.

서름서름한 눈길이 머무는 어둠에서 아버지는,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던 아버지는 이 세상이 출렁이는 다리였을까. 아무것도 잡을 수 없고 잡히지 않는 다리, 수심을 알 수 없는 바다 위에 놓인 긴긴 다리였을까. 저녁 해가 걸릴 때, 고개를 내민 달이 맨눈에 보이기 시작할 때, 빈손으로 차마 집에 돌아오는 것이 쉽지 않았던 말 없는 외로움. 흔들리는 삶을 감당해야만 했던 가장이라는 책임감. 간간이 드러나지만, 점점 희미해지는 아버지 존재가 속절없이 스르르 사라지는 무력감. 새로운 길이라고 들어선 길이 허망한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늦은 후회. 현실에 반응하기에는 이미 나약해진 자신을 습기 찬 마음으로 그렁그렁하게 증명해야 했던 열패감. 아마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지난날 영화가 그리워 술을 더 찾았는지 모른다. 그렇게 그녀의 아버지는 처방전이 필요 없어진 시한부 환자가 되었다.

멀리 보이는 수평선을 보며 출렁이는 다리에서 그녀는 이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생각한다. 전쟁을 겪었고 경제성장 시대 역군이었던 아버지를. 다섯 남매가 쑥쑥 자라는 모습에 기뻐했고 빨래판 장사가 잘되어 점점 불어나는 살림살이를 둘러보며 흐뭇해하던 아버지를. 북에 두고 온 부모와 친지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 깊어서 먼지 털 듯, 툭툭 털어도 털어지지 않던 마음을. 그녀의 어머니와 육자배기 가락 뽑으며 아픈 실향민이 감내해야 했던 복잡한 마음을 견뎠던 아버지를. 붉게 타오르며 열기를 뿜었던 지난날 살림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날에 기어이 눈물을 보였던 아버지를. 그녀의 생일에 시장에서 빨간 샌들을 사준 아버지를. 가족이 인천 송도해수욕장으로 물놀이 갔을 때 그녀의 동생과 함께 물고기를 잡았던 아버지를. 그때, 물에 반사된 햇빛이 튕겨 나가던 바위같이 단단한 아버지 등을 생각한다.

앞서가는 사람 등이 굽어 있다. 좁은 등이 좁게 흔들린다. 또 누군가가 다리를 흔들고 있나 보다. 출렁출렁. 바닷바람이 다리를 흔들고 지나간다. 추암에서 강릉으로 가는 바다 기차가 푸르게 지나간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하하하, 새파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