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

by 남쪽맑은물

장미는 봄 끝자락에서 여름 시작을 알리는 신호다. 봄이라기에는 낮 기온이 아주 따뜻하고, 여름이라기에는 밤 기온이 조금 차가운 계절에 만개한다. 장미는 다가오는 여름을 소개하려 여기저기에서 고개를 내밀며 인사한다. 너무 차거나 덥지 않은 공기를 머금은 웃음으로 향기를 내뿜는다. 아파트 담장에서, 빌라 골목에서, 전원주택 정원에서, 학교 운동장 가장자리에서, 수목원에서, 강가에서 그리고 바닷가에서.

산책하기 좋은 계절이다. 거리 곳곳에서 벙그러지는 장미를 보면, 향기 맡기 위해 몸을 구부리게 된다. 코로 들이마신 향이 오색찬란한 감성이 되어 몸과 마음에 머문다. 사람들 표정이 장미 무늬로 빛난다. 장미가 환대하는 시간이다. 전국 어디에서도 장미를 볼 수 있지만, 어느 해, 그녀와 함께 산책하며 맡은 장미향을 잊을 수 없다.

그녀는 부산에서 그림 그리면서 산다. 몇 년 전 간단한 짐과 그림 도구를 챙겨 서울을 떠났다. 그녀에게 그림은 오래된 바다이기도 하고 구불거리는 골목이기도 야트막한 동산이기도 하다. 그것은 퇴적한 추억이기도 하고 붉은 얼굴로 마중 나온 그리움이기도 하다. 장미가 만개하는 계절 오월, 이사한 그녀의 집에서 보낸 날들. 그녀는 가까이 생태공원이 있고 강 건너 섬이 보이고 더 멀리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장미를 그렸다. 장미가 풍경이 되어 압축되었던 상념을 사방에 풀어놓았다. 그녀와 함께 바다향과 장미향이 가득한 길을 거닐었다.

나에게 그녀와 함께 한 시간이 추상화로 다가온다. 형체가 불분명하지만, 그 느낌은 나만이 알 수 있는 살아있는 형체다. 발길이 닿은 곳과 눈빛 머문 곳에서 펼쳐지는 형형한 색상이 어른거리는 곳. 그녀의 동네는 바다가 주는 푸른빛으로 반짝이고 수분으로 촉촉해지는 곳이다. 유연한 낙동강 흐름과 을숙도 철새가 속삭이는 곳이다. 그 시각과 청각 이미지는 구족한 발걸음으로 다가오는 사람이기도, 스쳐 가는 바람이기도, 주름진 노을이기도 하다. 푸르른 바다를 태양 빛으로 물들이는 낙조가 한창일 때, 모든 생명이 터트리는 감동은 오색찬란하다. 그녀는 이렇게 다양한 이미지와 뒤발하는 감성을 그림으로 표현한다.

그녀는 예술가로서 남은 삶을 고향에서 보내고 싶다고 했다. 고향에서 달라진 풍경을 화폭에 담고 싶다며 결국 모든 짐을 옮겼다. 고향을 떠나 살았지만,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바다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되었다. 무한한 바다를 바라보며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궁금해했다. 아직 변하지 않는 것을 만날 수 있을 것이고 또 변하고 달라진 모습을 어떤 화법으로 표현할지 꽤나 들뜬 모습이었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부산 곳곳을 다녔다. 그녀의 발걸음은 청년이 되어 떠났던 고항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바다와 낙동강, 철새와 텃새, 도로와 다리, 선착장과 배, 노을과 달그림자 그리고 담벼락에 핀 장미를 그렸다. 그녀가 그린 장미는 가시보다는 붉은 꽃이 돋보인다. 붉은색은 고요한 활기를 뿜어내며 세밀하다는 것이 얼마나 따뜻한 의미인지를 표현한다. 빛에 의해 달라지는 장미 자태는 뾰족한 감정을 감싼다. 가시같이 날카로운 피곤은 태양이 분출하는 빨간색으로 완화된다. 이때, 장미는 태양 빛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빨간색이지만 조금씩 음영이 다른 붉은빛의 장미는 만개할 준비를 하고 있다. 마치 그림을 그리는 그녀의 얼굴 같다. 나는 알 수 있겠다. 붉은 장미처럼 그녀의 얼굴에 머문 홍조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그렇다. 그녀는 잘 지내고 있었다.

오월은 아름다운 잠재력을 마음껏 뿜어내는 계절이다. 그녀가 사는 동네는 장미가 만발해서 마치 장미 신전 같다. 무더기로 모여 있는 장미는 꽃무리 감성이다. 장미로 만들어진 터널을 걷노라면, 비감하거나 습습한 마음일지라도 삶이라는 터널을 유현하게 통과하는 기분이 든다. 그 기분은 강 따라 바다에 이르는 수평선 같은 기억이다. 기억은 웃음을 터트리게도 하고 묵언하게도 한다. 그녀는 바람 사이마다 웃고 있는 장미와 사람과 자연이 이루는 조화를 회화로 표현한다.

나무로 둘러싸인 푸른 정서에 장미꽃밭은 열정으로 화답한다. 이 향연에서 그 무엇이 협연하기를 거부할까. 울타리 모든 것이 예술처럼 보인다. 자유로움에서 리듬을 즐기는 오묘한 생명이 색과 향으로 표현하는 생태는 휘파람 소리처럼 싱그럽다. 더구나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장미 독주를 누가 방해하리오. 독주를 즐기는 모든 너나들이는 이 시간을 놓칠 수 없다. 녹색 공간에서 빨간 장미가 돋보이는 것이 백미다. 이 풍경이 계절에 의한 환희가 아니면, 헛된 위안으로 휘발될 일회성 공감으로, 사치스러운 경박함으로 사라질지도 모른다.

멀리 보이는 대양과 마을 지붕과 저 너머 보이는 회백색 아파트와 건물. 어떤 맥락으로 연결 지어질지 모를 인연이 궁금할 때, 점점 변화하는 풍경처럼, 다양함과 흑백 색상이 어우러지는 삶으로 다가오는 날을 기다리게 하는 작품이다. 그 풍경은 익숙한 듯 새로운 향으로 다가올 것이며 삶이 어리둥절할 때, 향이 사라지는 곳으로 눈길을 줄 것이다. 그러다 뒤를 돌아볼 것이다. 어디선가 뒤따라오던 향기 때문에. 그 향기는 바다향이기도 하고 어딘가에 피었을 장미향이기도 하다. 모든 향기는 정겨운 타인 손길이 아니겠는가. 그 향이 느껴진다면, 허청허청 그것으로 족하다.

그녀는 고향 풍경을 그린 작품으로 전시회 준비 중이다. 그림이 그녀를 닮았다고 생각하다가 정말 그녀를 닮은 것인지 한참을 응시하니 알쏭달쏭하다. 멀리 바다 배경으로 삶을 부리며 사는 산동네를, 선착장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배를, 원양 어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항구를, 어제 읽은 책이 오늘을 투영하는 보수동 책방을, 철새처럼 떠나고 다시 돌아올 터가 되는 모래톱을, 노을이 펼쳐진 몰운대를 그렸다. 낙동강을 물들이고 있는 태양 빛으로 피어오르는 장미향도 그렸다. 바다와 육지 색상 대비로 눈길을 사로잡는 꽃향기는 시간을 세월에 가둔 먹먹한 마음을 사르르 살아나게 한다. 진드기처럼, 만성질환처럼 엷은 마음을 움켜쥐고 있는 조양 상태와 우울의 반복이 꽃향기에 의해 정신없이 부서지기를 기대하며.

득시글거리는 자기 옹호와 변명이 생략된 그녀의 아픈 기억이 땅으로 스며드는 것처럼, 장미는 시들어 땅속으로 스며들 것이다. 스며들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는 기억은 햇귀에 비치는 상서로운 기운이며 어둑발 젖히고 뿜어내는 창작에 대한 열정이다.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다치고 후락한 기억뿐만 아니라, 멈추고 다시 일어나고 새살이 돋는 기억을 하얀 종이에 형태를 만들고 채색할 것이다. 그녀의 곁을 안타깝게 떠난 이들을 기억하며, 표표히 고개 내미는 인생을 그림으로 표현할 것이다. 그녀가 궁금해하는 사소한 물음에 대한 답을 그림에서 찾을 것이다. 그리고 추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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