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는 밤비는 고운 님 마음. 비야! 비야! 고운 비야! 밤새 내려라. 그리는 내 마음도 끝이 없도록.” 산이슬의 ‘밤비야’ 노래가 입안에서 맴맴 돕니다.
어제부터 단비가 내렸습니다. 고운 님 웃음처럼, 고운 님 손길처럼,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비가 밤새 내렸습니다. 가뭄으로 마르고 갈라진 농부 마음에, 잎마름병으로 고생한 농작물에 단비가 촉촉하게 내렸습니다. 주룩주룩 내리던 비는 실비가 되더니 오늘 그쳤습니다.
남자는 천변을 걷습니다. 토요일 저녁이라 사람이 제법 많습니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신발에서 물방울이 떨어집니다. 빗물 가득한 땅에 미세한 파문이 일어납니다. 발자국이 만들어내는 물 동그라미가 모호한 경계에서 사라집니다. 침묵을 표현한 문자같이, 손가락으로 그리는 부호같이, 하늘에서 보내는 신호같이, 조용하게 튕기는 물방울이 우주처럼 보입니다. 우주는 비유와 풍자와 환상과 현실이며, 흩뿌려진 비처럼, 쉼 없이 축축하게 흔들리는 삶입니다.
남자는 강물 따라 기울어진 풀잎을 쓰다듬으며 걸어갑니다. 물방울이 그의 손에서 터집니다. 동그란 이슬이 ‘토도독 토도독 톡톡’ 터지는 일이 재미있나 봅니다. 사라지는 물방울을 보며 남자는 오늘 있었던 일을 생각합니다. 추억이 될 하루의 끝자락에서 고개 들어 비 그친 하늘을 봅니다. 별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저녁이 짙어지면서 어두워진 밤 풍경. 남자는 누군가를 찾습니다. 저만치에서 어떤 이가 웃고 있습니다. 검은 모자, 파란색 티셔츠, 회색 운동복 바지를 입은 어떤 이는 남자의 친구입니다. 어둠에도 이를 드러내며 웃는 친구 얼굴이 장난기 가득한 고등학생처럼 보입니다. 남자는 친구에게 다가가 등을 가볍게 칩니다. 친구도 남자의 뒤통수를 어루만집니다. 두 사람이 보폭을 맞추며 천변 걷는 일이 오늘, 처음입니다. 남자가 이 동네로 이사 온 후로 친구와 이렇게 걷고 싶었는데,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났습니다. 저녁 식사 후, 각자가 지닌 개인적, 사회적 책임을 내려놓고 만나고 싶었습니다. 드디어 미루었던 시간을 함께 합니다.
고등학교 시절을 추억하니 즐겁습니다. 키가 비슷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달그림자가 따라갑니다. 반찬 없는 도시락을 나누어 먹었던 그들의 시절 이야기는 소박한 그림자입니다. 집이 멀어 비가 많이 오거나 눈이 오는 날이면 남자는 친구네 집에서 자곤 했습니다. 남자를 재워주고 따뜻한 밥을 지어주던 친구 어머니의 마음이 따뜻한 그림자로 따라옵니다. 교복과 모자로 한껏 멋을 냈던 어수룩한 이야기가 경쾌합니다. 장난기 가득했던 일을 회상하는 두 사람 모습은 젊은 그림자입니다. 그들이 나누는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현악기 탄주처럼 들립니다.
그녀는 그림자처럼 두 사람을 따라갑니다. 두 그림자를 따라가는 일이 마치 편지를 읽는 것 같습니다. 읽기를 멈출 수 없는 편지 말입니다. 남자는 등을 돌려 그녀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합니다. 그녀는 남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웃습니다. 친구도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봅니다. 빠르게 흐르는 물줄기에 눈길을 주던 그녀는 그들을 바라보며 양손을 흔듭니다.
천변 반환점에 다다랐습니다. 그녀와 남자 그리고 친구는 걸음을 멈춥니다. 밝은 조명이 오색 불빛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프리즘으로 보이는 풍경처럼 빛이 굴절되고 분산되면서 주변이 환해졌습니다. 주름진 세 사람 얼굴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그러다 번지는 빛처럼 그들 얼굴이 점점 흩어지고 그들의 대화가 물줄기 따라 흘러갑니다. 나무뿌리가 휘청일 정도로 강한 물살은 추억이 가득한 얼굴을 데리고 갑니다.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제법 크지만, 아마도 내일은 물살이 조금 약해져 물소리도 작아질 겁니다.
이제, 왔던 길로 되돌아가야겠습니다. 되돌아갈 수 없는 것이 인생이지만 되돌아갈 수 있는 추억이 있다는 것이 좋습니다.
그녀는 남자와 추억을 만듭니다. 남자의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과 군대 시절을 함께 하지 못했어도, 그 후의 삶을 남자와 동행하는 그녀는 남자의 친구도, 남자의 지난 시절도 추억입니다. 빈손으로 만나 지금까지 살아온 날이 추억입니다. 아이가 자라고, 방이 한 칸 더 있는 집으로 이사한 것이 추억입니다. 부모님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고, 괜찮다는 의사의 말을 기다리며 위로하는 일이 추억입니다. 그녀와 남자는 추억이 같은 사람입니다.
어젯밤에 내렸던 단비가 추억입니다. 내일도 추억으로 꽃비가 내릴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