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려진 시간, 마음을 뚫고 간 구멍

by 남쪽맑은물

이 집으로 이사할 때, 그녀는 낡고 불편한 것을 손보지 않고 그냥 짐을 부렸다. 전세 품귀 현상 속에서 세입자가 쭉 살았던 집이었기에 벽은 누렇게 바랬고 새시도 낡았지만, 집주인은 도배나 새시를 하지 않아도 다른 세입자를 들일 수 있고 그녀는 아이 통학을 위해 그 집이 필요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도배만이라도 할지 망설이다 비용을 생각해서 그냥 이사했는데, 이사하고는 후회했고, 후회는 사유의 실마리가 되었다.

이전 세입자가 이사 간 텅 빈 집은 생각보다 훨씬 엉망이었다. 지저분해서 가려야 할 벽이 너무 많았다. 가구로 적당히 가려줄 곳은 가려 준다 해도 여전히 드러내놓고 있는 얼룩진 벽지는 마치 마음에 남아 있는 더러운 자국 같아서 신경이 쓰였다. 흠집 나고 얼룩덜룩한 벽에 시계 걸고, 아이가 미술 시간에 만든 작품도 붙이고, 사진과 그림, 공연 포스터로 가리니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그때 알았다. 달력이 제 몫 이상의 일을 한다는 것을. 거실과 안방 에어컨 호스가 빠져나간 자리에, 주방 유리창 옆 습기 찬 자리에, 못질이 심해 흉한 꼴을 한 아이 방에 달력을 걸었다.

달력에 관심을 두니 달력에서 시대 흐름을 읽을 수 있었다. 수영복이나 한복 입은 여배우 사진 달력, 약국이나 한약방에서 나누어주는 달력, 신도를 위해, 포교를 위해 교회나 절 같은 종교단체에서 발행하는 달력, 꽃꽂이 사진 달력, 외국 어린이가 어른 흉내를 내며, 예를 들면, 엄마의 빨간 뾰족구두 신고 드레스 입은 여자아이와 아빠의 반질반질한 검은 구두 신고 모자 쓰고 신사복 입은 남자아이 둘이서 푸른 눈을 반짝이며 그네를 타고 있는 사진 달력 등등, 달력은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고 홍보 목적을 이루고 쉽게 갈 수 없는 이국 문화에 대한 숭배를 부추겼다.

요즘은 그림책 삽화, 사진작가 작품, 우리 민화나 진경산수화, 근현대 미술작품, 세계 유명한 화가 작품, 문화유산, 성지순례지,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인물에 대한 업적 등 달력이 소모품이 아니라 예술품이라는 생각이 들기에 부족하지 않을 만큼 전달하고자 하는 이미지가 감성을 자극한다. 자기가 그린 그림이 담긴 달력을 소량으로 만들어 선물하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날짜와 요일을 알려주는 본래의 시간에 대한 의미에다 정체성과 아름다움이 더해져 그림 감상이 가능한 달력이 예술이 아니면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공간마다 그림은 무기질의 정신세계를 누릴 수 있게 하고 시장기 도는 감성을 푸근하고 늘펀하게 펼칠 수 있도록 초대한다.

그런데 올해는 경제 불황 때문인지 달력이 부족하다. 보험회사나 자동차 회사에서 주는 탁상용 달력은 충분한데 벽걸이 달력은 구하기가 힘들다. 친구에게서 미술관에서 나온 달력을 받았는데 그 달력을 주방 유리창 옆에 걸었다. 이빨을 드러내고 웃고 있는 가족 그림인데 동그랗고 둥근 얼굴에서 마음 바닥에 붙어 있던 그리움이 회올려진다.

어린 시절, 새해가 되면 그녀는 언니와 함께 지난해 달력으로 새로 받은 교과서 표지를 싸곤 했다. 모서리마다 마무리를 깔끔하게 정리하는 언니를 따라서 꼼꼼하게 새 책 냄새를 맡으며 신학기를 준비했다. 그림이 있는 뒷면의 하얀 종이로 책을 싸기도 했고 멋진 그림이 보이도록 싸기도 했지만 어느 쪽으로 책에 옷을 입힐 것인지 선택하는 일이 그 나이다운 고민이었다. 매끄러운 촉감이 좋아 자꾸 매만지며 그 느낌을 즐겼다. 지난 물건으로 새로 시작하려는 물건을 단도리하는 시간을.

그녀는 그녀의 언니와 함께 달력에 있는 꽃이나 새, 나무 그림을 오려서 미닫이 방문 창호지에 붙였다. 그림이 떨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문을 여닫으면서 손으로 한 번씩 그림을 꾹꾹 누르고 그림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만지곤 했다. 사계절을 알리는 풍경화를 벽에다 오려 붙이고는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동경으로 마음이 울렁거렸다. 트랜지스터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방안을 구성하는 아름다운 이미지와 어우러져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상상하다 딩, 딩, 울리는 괘종시계 소리에 상상을 멈추곤 했다. 달력은 다른 종이보다 딱딱해서 책갈피로 활용하기도 했고 딱지로 만들기도 했다.

만물의 기대감과 새로움의 시작을 알리는 세 번째 밀레니엄의 시작은 요란했다. 그만큼 새해 달력은 화려해지고 풍부해졌지만, 달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시들해지고 재미도 없어졌다. 언니는 달력이 한 장씩 넘어갈 때마다, 한 사람씩 병문안을 다녀갈 때마다 거부하는 음식이 많아졌다. 그들이 환자를 걱정하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 언니의 거식증을 부추겼다. 환자에게 좋지 않다는 음식이 늘어감에 따라 언니가 잡고 있는 지푸라기는 가늘어지고 짧아졌다. 먹고 싶은 음식이 줄어들고 먹을 수 있는 음식 종류가 적어지니 기력이 쇠하여 자꾸 잠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오히려 잠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 순간의 연속인 듯 눈을 감고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수분이 빠져나간 마른 과일처럼 점점 오그라드는 몸과 마음이 앙상했다. 그러다 잠에서 깨어나면 통증이 더욱 깊어 몇 곱절의 괴로움을 표현하곤 했다.

그다음 해 이월 마지막 날, 봄날을 얼마 남겨두고 그녀의 언니는 고통에서 떠났다. 지금까지 먼지처럼 쌓여있던 인간의 원죄가 청소기에 빨려가듯, 독신의 삶을 깨끗하게 정리했다. 청빈한 유골 항아리는 언니의 삶을 말해주고 있었다. 삶이 깨끗해서 마음이 아리고 옥색 항아리여서 마음이 저리고 항아리에 이름 석 자만 있어서 마음이 적막했다. 아리고 저린 느낌을 가리기 위해 그녀는 눈을 꼭 감았다.


그녀는 가려진 시간 속에서 언니의 고통스러운 마지막을 생각한다. 지워도 자꾸 날아오는 스팸 문자처럼, 기억하지 않으려 해도 떠오르는 언니의 마지막을 마음 깊이 숨겨 놓고 산다. 그리 빨리 떠나다니. 그녀에게 다재다능, 만능, 가능성으로 가득한 언니에 대한 기억이, 언니와 공고하게 비밀처럼 공유했던 여러 가지 일들이 그녀의 마음을 뚫고 큰 구멍으로 남아 있다. 찬란했던 날들이 창백한 빛이 되어 그녀의 발밑에 오물거리다 모른척하고 나타날 때, 그녀는 주저앉아 엉엉 울음 같은 숨을 몰아쉬곤 한다.

그녀는 마음 구석구석이 도배하지 않은 벽처럼 지저분하고 얼룩지고 구멍이 나 있지만 어지간한 세상 아픔들은 적당히 메우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어느 날 문득, 가려지지 않는 생생한 기억의 구멍에서 이따금 헝클어진 마음이 삐질삐질 새어 나온다. 그러면 슬픔 속에 길든 단맛 같은 것을 기억해 내려고 애쓴다. 이 애씀은 가엾음이 아니라, 선명하고 깊은 그림자를 만든 밝은 빛을 쫓아 그 빛을 응시하려는 애씀이다.

다른 집으로 이사하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가구들처럼 밑바닥에 쌓여 있는 먼지를 품고 잘 견뎌야겠는데…. 그러나 일 년에 한 번은 감추어진 벽에 있는 얼룩을 고스란히 드러내고야 마는 달력처럼, 그녀는 매년 봄이 오는 길목에서 메워지지 않는 구멍에서 솟아나는 그리움을 견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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