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동자

by 남쪽맑은물

한창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아이는 어디에도 시선을 고정하지 못한다. 아니,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어 보인다. 처음부터 무채색이었던 공간에 무엇으로든 채워야 하는 강박증 같은, 선명하지 않은 공간에서 찾으려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시선을 고정하지 않기로 결심한 얼굴이다. 묻는 말에 대답도 시원하게 하지 않는다. 검고 큰 눈을 깜박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으로 봐서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이리라. 그래서 아이의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다. 그러나 두 눈을 깜박깜박하는 사이, 아이의 검은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한다. 그 빛은 전혀 기억이 없는 부모를 만나고 싶다는 집념뿐,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어 보인다.

그녀는 이 아이를 입양했다. 입양할 당시에 그녀의 결행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자녀가 없는 것도 아니고 자녀 한 명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던 그녀가 왜 입양을 결심했는지 의아했다. 두 아이를 키우는 게 그리 만만하지 않은 것을 잘 아는 그녀가 입양을 결정하게 된 이유를 들으며 놀라면서 응원했다. 이유에는 종교적 신념과 더불어 젖꼭지를 가지고 태어난 생명에 대한 존엄이었다. 아이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이 아이를 품에 안은 그녀와 그녀의 남편에게 경의를 표할 따름이었다. 많은 이가 쉽게 하지 못하는 일을 하는 그녀에게 걱정보다는 미래를 응원했다. 아직 젖도 떼지 않은 아이의 눈동자에서 하나님이 보기에도 좋았던 순수를 보았을 때, 심심한 마음을 가진 그녀와 그녀의 남편 손을 잡았다.

아이는 잘 자랐다. 그녀는 아이의 명랑한 기질이 초등학생인 딸과 다르면서도 여린 감수성이 비슷하다고 했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아이를 잘 보살폈고 그녀의 딸은 갑자기 나타난 낯선 아이를 쑥스러움과 경이로움이 깃든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후, 그녀의 가족은 이민을 갔다. 이민을 결정하게 된 이유가 아이 때문으로 추측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런 것은 아니었다. 긴 시간이 흘렀고 그동안에 그녀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종종 전해오는 소식, 잘 지내고 있으나 가끔 고민하는 일들에 대한 상황 등으로 알고 있었다. 젖병을 물고 있던 아이는 훌쩍 자랐다. 그런데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고민하는 나이가 된 아이는 자기 정체성이 궁금했다. 도대체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도대체 나는 왜 사는가. 나를 낳은 사람은 누구인가. 왜 나를 버렸는가. 나를 버린 부모는 죽었는가 살았는가.

그녀와 아이는 아이의 생모 소식을 알기 위해서 한국에 왔다.

영화 「라이언(Lion)」(2017, 가스 데이비스 감독)에서 5살 사루는 기차에서 깜빡 잠들어 인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눈을 뜬다. 생전 가본 적이 없는 거리에서 형을 기다리는 사루. 기억나는 것은 정확하지 않은 마을 이름뿐.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호주에 사는 가족에게 입양된다. 인도에서 호주까지 거리는 7,600km. 새로운 가족과 함께 사루는 잘 자라 멋진 성인이 된다. 30살이 된 사루는 어느 날, 엄마가 불임으로 자신을 입양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으로 힘들어하는 과정은 어김없이 찾아왔고 자신의 기억을 끄집어내어 생모를 찾으려 애쓰는 모습을 엄마가 알면 배신감을 느낄까 봐 고심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엄마는 사루에게 “나는 불임이 아니었다. 세상에는 사람이 아주 많다. 그래서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아이를 거두어 기회를 주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사루의 눈동자에 고인 눈물은 삶의 안도감으로 더욱 빛나는 사랑의 눈물이고 구글어스(Google Earth) 위성 지도의 빛을 따라 생모를 찾게 될 것이라는 안도감의 눈물이었다.


버려지는 아이가 너무 많다. 매년 길을 잃고 실종되는 아이가 많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로 버려지는 아이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누군가의 돌봄으로 잘 살아가고 있는지 염려하며 돌봄에 대한 사회의식을 점검한다. ‘아이를 찾습니다’라는 절규가 심장에 박힌다. 열악한 보호시설, 인신매매의 늪, 방치된 관심, 도움 시스템을 믿지 못하는 사회 현상 등 실종되는 아이의 처우 문제가 사각지대에 있다는 것을 영화 「라이언(Lion)」 초반부에서 충분히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 여러 보호시설의 부정부패가 힘없는 아이들의 피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을 여러 매체 보도로 접하고 있지 않은가. 태어나면서 버려진 아이들이 음성적 거래에 이용당하면서 음성적 삶의 언저리에서 어슬렁거리며 살아간다면 그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아이의 생부 소식은 전혀 없고 생모는 젊고 경제적으로 넉넉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만나지는 못했지만 입양을 주선한 곳에 생모의 정보가 누락되기 전에 있는 정보만이라도 알게 된 것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그때 조금 떨렸던 아이의 눈동자, 흔들리는 눈동자에 매달린 촉촉한 수분의 미동을 기억한다. 아이는 더 키가 컸는지, 건강한지, 검은 눈동자가 여전히 빛나는지 아니면 더 빛나는지, 초콜릿을 여전히 좋아하는지, 아직도 짧은 반바지를 입는지, 남자 친구는 있는지, 학교 친구들과 짝짜그르하게 웃으면서 지내는지 궁금하다.

아이는 성인이 되었다. 영화의 사루처럼 아이는 생모를 찾기 위해 구글어스(Google Earth)가 필요할지 모른다. 그러나 아이는 구글어스(Google Earth)보다 그녀의 사랑과 보살핌이 방향이 되고 길이 되며, 빛이 되기에 그것으로 충분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 생모를 상상하며 나름대로 긴장을 감추려던 아이의 표정, 흔들리던 검은 눈동자는 과거가 되었을 것이다.

아이가 어떤 이유로 생모와 이별해야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사실이 살아가는 여정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아이의 정체성으로, 혹시 슬픔으로 남아 있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녀와 손잡고 그 무엇을 지나가기를 바란다. 막막했던 시간이 어떤 색으로 채워졌는지, 그 시간에서 찾은 것이 무엇일지, 어쩌면 알지 못하고 그냥 지나갔을지 모를 삶의 궤적을 만들면서. 그동안 그녀에게서 아이가 받은 사랑으로, 그녀가 아이에게 준 사랑으로 그 시간이 채워졌음에 틀림없다.

풀벌레 소리나 시냇물 소리를 적어둘 수 없는 것처럼, 적어 둘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진 삶에 대한 애정은 생각보다 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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