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Up

by 남쪽맑은물

공방에 도착했을 때, 그녀가 있었다. 명장과 조금 전에 통화했기에 당연히 공방에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명장은 보이지 않고 그녀 혼자서 도자기를 빚고 있었다. 그녀는 명장이 지금 공방으로 오는 중이라고 말했다. 명장을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마치 공방 방문객에서 전시 안내하듯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전해 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전시된 명장의 작품 배경이나 과정과 함께 지극히 개인적 사유가 깃든 산문 같은 이야기를.

수녀복에 앞치마를 두른 그녀의 모습이 생경하고 신선했다. 그녀는 매주 한두 번씩 작업실에 와서 흙을 만지는 호사를 누린다고 했다. 정해진 시간에 오는 것은 아니라면서 명장이 없는 시간에도 들어올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고 명장의 수제자나 관리인은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편안하고 즐겁게 취미생활을 하는 것이라며 운이 좋은 날은 명장이 도자기를 빚을 때 옆에서 배우고 있다고.

성모마리아나 십자가 같은 성물을 만들 거로 생각했던 추측은 조용히 빗나갔다. 그녀의 손에 들린 흙덩어리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부모님 형상을 빗는 거라며 부모님의 얼굴과 몸, 팔과 다리를 꼼꼼하게 만지며 말했다. “종교 관련 성물을 만든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요. 물론 십자가나 예수와 성모님을 만들었지만, 요즘은 부모님 형상을 만들고 있어요. 부모님의 익숙한 표정이나 몸짓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생각하다가 울컥하곤 합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간지럼 태우듯, 흙을 살살 문지르며 흙을 만지는 시간이 그리 좋을 수 없다고 했다. 아무 때나 작업실에 와서 흙과 놀 수 있도록 출입을 허가한 명장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놓치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작업실에 들어올 때 그 느낌을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아득한 마음이라고. 번호를 띡띡띡 누른 다음 띠리리 하는 소리가 들리면 문고리를 돌리고 한걸음 공방으로 발을 내딛을 때, 공방 내부에 미리 창문을 통해 도착해 있는 빛은 마치 멀리 갔다가 다시 돌아와 있는 사람의 온기 같다고 했다. 그 온기가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 날은 작업실에 들어와 한참 동안 우두커니 빛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다. 문을 통과하는 것이 참으로 쉬운 일 같지만, 그 순간은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것처럼 신비한 일이라 했다. 그것이 그날의 기도라면서.

하나만 달라져도 많은 부분이 달라지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을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아무리 애를 쓴다 해도 되돌아갈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니까. 그렇기에 가끔 인생 밖으로 나가 나를 바라보는 관찰자가 되고 싶을 때가 있다. 현실과 상상 그 가운데 인생을, 이것과 저것이 아닌 그 사이를, 지옥과 천당이 아닌 연옥과 비슷한 곳에 머물고 싶을 때 말이다. 삶이란 희로애락에서 숨고개를 넘어 수풍지화로 가는 여정이라던 누군가의 말이 생각났다. 숨에도 모양이 있다면 들숨과 날숨 외에도 다양한 숨 그림자가 겹친 모양일 것이다. 그러나 아주 작은 숨죽인 움직임으로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삶이다.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숙연해지는 것이 삶이다.

명장은 손가락에 지문이 거의 없어요.

손에 있던 사람 모양의 흙덩이를 내려놓으며 그녀가 불현듯 말했다. 흙 묻은 그녀의 왼손에 묻은 흙을 오른손으로, 오른손에 있는 흙을 왼손으로 털어내면서 지문이 사라질 정도로 흙을 만진 손으로 탄생한 작품은 지그시 눈을 감게 만든다고 했다. 가끔은 명장에게서 명장이기에 느낄 수 있는 그 느낌에 젖어들 때가 있는데, 그 순간이 그리 좋다면서, 아마도 그것이 명상이 아니겠느냐고, 지문이 흐려지도록 흙을 문지르다 보면 저절로 눈이 감기곤 한다고. 그녀는 도자기를 만드는 시간만큼은 도자기를 빚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도 했다. 도자기를 빚을 때는 수녀가 아니었던 지난날을 생각하고 수녀인 지금을 생각하면서, 흙을 만지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어깨를 움직이고 눈동자를 굴리면서 가끔 고개를 젓다가 계속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 무음의 숨소리 같다고 했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눈 지 얼마나 되었을까. 무표정한 얼굴로 도무지 알 수 없는 세상에 물어볼 것이 마땅치 않다고 생각했을 때, 어리무던한 눈길로 달항아리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명장이 작업실에 나타났다. 명장의 지문이 궁금했기에 명장의 손가락을 만져보았다. 점점 따뜻해지는 날씨에 비닐하우스에 붙어 있던 눈이 스르르 땅으로 떨어지듯, 지문이 비닐처럼 맨질맨질했다. 흙냄새 가득한 공간에서 지문이 닳도록 흙은 문지르며 보편적이고 통속적인 것을 헤아리는 시간은 세월의 지문을 만지는 일일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흐려지는 것이 지문만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고통과 아픔으로 점철된 모든 삶이 점점 흐려지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지금’에서 다시 시작하는 손가락 끝 감각을 만나게 된다.

눈을 감으면 바보스러운 자기 모습을 투영하거나 정처 없이 저벅저벅 어디론가 걸어가는 모습이 보일까. 발걸음이 느껴지고 발걸음 뒤에 따라오는 그 무엇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오히려 안온한 마음이 되어 포근한 잠에 빠질까. 마치 『사랑과 영혼』(미국영화, 1990)에서 육체가 없는 영혼이 사랑하는 이 곁에 맴맴 돌듯이, 흙에 존재하는 영혼이 떠날 수 없어 빙글빙글 돌고 있는 숨결을 느낄까. 영혼의 그림자처럼 그렇게 그대로 흙은 영혼의 무덤이 아닐까.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졌기에 흙으로 돌아간다고 하지만, 한 사람, 그리고 또 한 사람의 영혼이 모이고 모여 흙을 구성하는 것이 아닐까.

삶과 삶을 이어주는 것을 더 이상 바라지 않아도 되는 삶과 막상 눈앞에서 꺼져가는 희망을 바라보는 삶도 현실이다. 무엇을 기대하지 않으려는 삶도 무엇이 되려고 애쓰는 삶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 중간 지대에서 삶을 무연히 바라보는 것도, 세심하게 관찰하는 것도 삶이다.

명장이 만든 하얀 컵 표면이 명장의 지문처럼 미끈하다. 선물로 건네주는 컵을 받으며 명장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끝이 마치 못대가리처럼 두툼하다. 지문이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생태적으로 손가락에 표시된 무수한 빗금과 둥근 금은 아마도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생의 무늬일 것이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는 상투성이 덕지덕지한 문장이 특별한 문장으로 다가오는 날, 움직일 수 없는 나무가 이끼를 보듬고 있는 풍경이 속삭이듯 다가온 날,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날들일 것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눈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