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지 모를 떨떠름한 이 느낌은 무엇일까. 만족스럽지 못한 느낌은 아마도 허욕으로 보이는 미술관 측의 의도가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모네에서 워홀까지’ 근현대사 서양미술 전시회에서 클로드 모네의 ‘수련’ 한 점과 앤디 워홀의 ‘초상화’로 전시회를 대표하기에는 뭔가 부족했다. 모네와 워홀 작품을 부족하지 않게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실망으로 변했다. 안내 문구에 낚인 듯한 마음은 참을 수 없는 여름 무더위를 탓하는 투덜거림이 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손해 보는 것 같은 전시회를 또 보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던 알퐁스 오스베르(Alphonse Osbert)의 「고독」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자료에 의하면, 화가는 프랑스에서 점묘화가인 쇠라와 함께 보자르 예술학교에 다녔고 1880년 후반부터 범신론적인 시의 영향을 받아 자기 작품에 색채와 선의 의미를 신성화했다. 특히 파란색과 보라색의 파스텔 색조는 신화적 상상력을 불러오게 한다. 보라색에서 파란색으로 변하는 그러데이션은 입체적이고 몽환적이라는 평론가 글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사람을 소극적이면서 무력하게 만들고 역으로 진실한 자신을 오랫동안 바라보게도 하는 고독을 그림으로 사유하면서 한동안 만나지 못한 그녀를 생각했다.
갑작스럽게 외부로 향하는 문을 닫고 돌연하고 단호하게 타인과 소통을 거부하던 날들. 뭘 하고 싶거나 어디로 가고 싶은 욕구가 전혀 없고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우울증과 거식증. 너무 빠르게 살이 빠진 모습. 고통의 근원이 비슷한 것 같지만, 드문드문 피가 몰리는 상처에서 흘린 피의 농도는 황폐한 들판을 가로막고 서 있는 개인의 재앙으로 드러난다.
- 죽으려고 했어.
- 왜?
- 세상이 모두 나를 향해 흉한 말을 하는 것 같아서.
- 세상이 너에게 뭐라고 하는데.
- 내가 감추고 있는 것을 다 알고 있다고.
- 그럼 물어봐. 무엇을 아느냐고.
- …, ….
대인기피증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는 그녀를 만났다. 얼마 만에 하는 외출일까. 누구에게는 쉬운 일이 그녀에게 너무나 어려웠던 일. 멀미 날지도 모른다는 그녀의 건강 상태를 고려해 안전하고 조심스럽게 운전하며 도착한 인공 호수. 그녀는 고통으로 죽을 수 있다고. 아니 죽고 싶었다고 했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어리둥절해하다가 시선 둘 곳을 찾았는지, 찰랑이는 호수 물결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상처에 새살이 돋아나 생긴 흉터로는 고통을 다 알 수 없고 고통에서 시작한 고독은 비틀려 있는 감정의 사치일 뿐이라고. 그녀는 슬픈 듯했고 지친 듯했다. 어쩌면 무표정에 가깝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리라. 호수에 일렁이는 물결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어 호수 너머 숲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또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더니 종내에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들피진 얼굴에 움푹 팬 볼이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신은 왼손에 칠현금을 들고 강 건너편을 향해 오른손을 들고 있다. 그런데 그 손끝에서 외로움이 묻어난다. 외로움이 상상과 현실을 뭉개버리는 결핍이라면, 외로움은 기억 구멍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생전 처음 보는 자신이기도 하다. 여신의 시선은 흐르는 강물에 머문다.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그 눈물이 강으로 이어지는 듯하다. 여신 뒤에는 나뭇잎 무성한 나무 두 그루가 있다. 여신보다 서너 배나 키가 큰 미끈한 나무둥치다. 여신을 지켜주는 장승처럼 든든하다.
강 건너편에 숲이 있다. 숲 자체가 명상에 잠긴 모습이다. 여신과 숲 사이에 놓여 있는 강물은 노을을 반사하고 있다. 출렁이는 물결 세기가 바뀌는 순간순간을 파란색과 노란색으로 표현했는데, 색의 변화는 도식적이면서 계산적 현실을 보여주듯 냉정하고 차가운 느낌이 든다. 현대사회의 냉혹함이 차가운 수면으로 느껴진다. 차갑게 느껴지는 수면은 그 위로 부유하는 냉정한 현실이다. 현실과의 단절은 심한 우울과 정신적 폐허를 동반한다.
강 건너편을 향해 내민 여신의 손이 떨린다. 떨리는 손으로 수면 아래에 있는 생명을 건져 낸다. 건너편 숲에서 여신을 지켜보고 있던 정령들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음파가 잔잔한 물결을 일렁이게 한다. 냉혹한 현실도 살아볼 만한 것. 수면 위로 나온 생명이 여신의 손을 잡는다. 가녀린 손이다. 나약한 생각이나 불안한 마음이 자유로운 몸과 마음을 구속한다 해도 여신은 외로운 생명의 손을 놓지 않는다.
노을을 반사하는 물결은 인생을 대변한다. 강하고 약하게 일렁이는 물결이 변덕스러운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인생을 표현한 것이리라. 독선적이고 비웃음이 강한 생명체라도 찬란한 석양의 노을빛처럼, 말없이 넉넉한 나무둥치처럼, 고독이 감동으로 전해지는 것을 외면할 수 없다.
고독은 고통의 일종, 아니, 고통의 뿌리가 고독이다. 고독은 관계의 단절에서 온다. 그래서 고독은 외로움과 두려움에 슬픔과 독선을 동반하기도 한다. 고독이 뿌리를 내리게 되면 고통이 된다. 그러한 고통을 동반한 고독이 우리네 삶 주위에 맴돌 때, 연민과 강한 자애심이 싹트기도 한다. 고독은 명상이고 치유이며 새로운 에너지이기도 하다. 지극히 외로운 사람이 외로운 사람에게 손을 내밀 듯이, 고독으로 치유를 경험한 사람은 고독으로 가는 통로를 막지 않는다.
고독은 양면성을 갖고 있지만 표리부동한 것이 아니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전설 같은 것이다. 전설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 낮이 밤을 부르듯이, 끝없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외로움을 부른다. 그러다 아침이 되면 해가 뜨는 것처럼, 눈을 뜬다. 고독은 고통의 뿌리가 뻗어있는 강 밑바닥까지 끌어내려 새로움을 갈망하게 한다. 강물에 닿은 고독은 충분히 수분을 섭취한 후, 수면 위로 떠올라 숨 쉬며 삶의 일부가 된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감동되기를 희망하면서 견딜만했던 고통으로 빚어진 찬란한 빛을 기다린다.
고독은 일상의 복잡한 관계성에서 오롯이 자신만이 아는 신비로운 영역이고, 고독의 내심은 근력이고, 냉정한 사회로부터 느꼈던 이질감과 차가움이 내면에서 곰삭는 일이고, 고통에서 지혜를 얻고 힘을 빌리는 것이다. 높낮이가 다른 물결의 출렁임처럼 예측 불허한 인생에서 자아를 찾는 일이 고독이다.
그녀는 세상에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을까. 답을 찾았을까. 밥을 잘 먹을까. 잠은 잘 잘까.
낯선 화가의 「고독」 앞에서 낯익은 그녀의‘고독’을 생각한다. 고독은 고통에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