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대학 졸업 후 그녀를 다시 만난 건 삼십여 년이 지난 중년의 어느 날이었지요. 안경 너머 반짝이는 눈동자, V자 형 갸름한 얼굴, 가느다란 손가락이 여전하더군요. 변했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녀가 한껏 멋을 낸 귀걸이, 목걸이, 반지였어요. 변했다기보다는 새로운 모습이겠지요. 짧은 머리에 챙모자를 즐겨 쓴 젊은 시절의 모습이 아니라 장신구로 멋을 낸 중년의 그녀는 낯설지만, 멋있었습니다.
이제 노년이 된 그녀가 어는날, 이런 말을 하더군요. 보석을 넣어둔 통을 버렸노라고. 그게 말이 되는 일이냐고, 가짜도 아니고 진짜 보석을 쓰레기처럼 버렸다는 것이 의아했지만, 정말 그랬다는군요. 삶의 모순덩어리도 우아하게 만드는 장신구 이론마저 잃어버린 거라면서요. 아마도 그녀가 장신구로 표현하는 우아함은 최후까지 남아 우주에 펼쳐질 이미지는 아니었나 봅니다.
그녀는 모은 보석을 꺼내서 보는 게 즐거움이었다고 합니다. 보석을 보면 사게 되고, 또 보다가 자꾸 사게 되어 보석상자가 꽤 묵직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어떤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이 욕망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싶어 보석함에서 종이상자로 옮겨두었는데 그것을 재활용할 상자라 생각하고 버리는 일이 일어난 것이지요. 꼭 만화 같은 장면이 펼쳐진 것입니다. 한동안 속상했지만,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지게 되어 도움이 된다면 좋은 일이고 그렇지 않다면 어쩌겠냐는 이야기였어요.
신도 할 수 없는 체념 비슷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이 신기했어요. 그것이 처음부터 그녀의 소유가 아니었다고 말하면서 마치 도를 깨달은 성자처럼 말하더군요. 무슨 돈지랄이라면서 분개할 뻔했지만(사실 저는 무척 아까워서 화가 났거든요.) 이제 통속함과 이별했다는 그녀의 말을 듣고는 지독한 통속이란 무엇일지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보석을 잃어버리고 평정심을 잃지 않는 그녀의 말이 모순덩어리로 빛을 내는 우아함처럼 느껴졌거든요.
사노 요코의 에세이, 『사는 게 뭐라고』에서 도도하고 까칠한 독거 작가의 일상 철학을 만날 수 있습니다. 노후 생활을 긍정으로 잘 살아가려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면 오히려 우울해지더라는 작가의 말에 동감하면서도 궁금해지더군요. 수명이 길어지는 요즘, 너무 잘 살아가려는 노력이 힘겨울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어떤 소수에 의해 미화된 노후의 삶을 일반화시켜 그럴 힘이 없는 사람들을 더 힘겹게 한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사실 혼자 밥 먹는 일도 정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현실이 제 주위에서 일어납니다. 집이 아닌 밖에서 혼자 밥을 먹는 일 말입니다. 밥 먹은 일은 하루에 세 번을 해야 하고,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데, 그것을 혼자서 못하는 사람은 정말 힘든 일이거든요.
어느 날, 우리는, 그녀가 보석을 잃어버린 것처럼, 그렇게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을 어딘가에 버릴지 모릅니다. 허상을 날리기 위해서라면 다행이지만, 소중함까지 몽땅 내다 버릴까 봐 겁이 날 때가 있습니다. 지속적, 본질적으로 지능이나 의지, 기억을 상실하는 병을 두려워하다 보면 우울해지지요. 사실, 어차피 내 것이 아니었다는 마음으로 날려버릴 수 없는 것이 있잖아요. 어떻게 나의 기억과 의지가 내 것이 아닐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우울한 일을 좋은 마음으로 지나가는 것은 쉽지 않고 더구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지나기는 더욱 어렵겠지요.
사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 자식이 뭐라고, 돈이 뭐라고, 뭐라고, 어쩌라고…. 살아있다는 것이 고뇌이기에 그것에 대한 항변처럼 들린다 해도, 이런 말을 하지 않고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생각이 듭니다. 낭만과 허무의 교차점에서 헤매는 것이 지금까지 살아온 여정이었기에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순간마다 잘 지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게 뭐라고, 어쩌라고’라며 외마디를 지르곤 합니다.
소중했던 것들의 부재를 이겨내는 것이 지금까지의 일이었고 앞으로의 일이라는 생각에서 그렇게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소중하다는 것들이 달라지고 그 의미는 변합니다. 이런 변덕스러움에 책임지고 싶지 않아서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음을 실토하는 것은 아닐까요. 보석이라는 욕망덩어리가 우아함을 가장한 통속한 모순덩어리는 아니었을까요. 모순된 욕망의 통속함과 이별한 그녀가 ‘보석이 뭐라고’라고 말하며 웃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사노 요코는 ‘나 자신이 죽는 건 아무렇지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가까운 친구는 절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죽음은 내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찾아올 때 의미를 가진다.’라고 말합니다. 내가 떠나기 전에 친구가 먼저 떠나 버리는 상황이 무섭고, 미리 떨고 있는 자기를 생각하면 쓸쓸해지는 것이지요. 이러니 어떻게 매 순간을 긍정적이고, 잘 살 수 있을까요. 그것도 노년에 말입니다.
누가 먼저 세상을 떠날지 모르지만, 그 생각을 하면 무척 두렵고 떨리며 참 쓸쓸한 일입니다. 그러니 매 순간을 긍정적으로 살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요. 그것도 용기의 일종이 아닐까요. 용기는 인간이 위대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신호지요. 인간이 위대한 감정을 품지 않으면 위대한 흥미도 없어지는 것이니까요. 흥미가 없는 삶은 고통을 참거나 어려움을 인내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을 위해 죽을 수 있다는 용기가 없다면 인류는 멸망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용기가 점점 작아지는 순간, 삶의 의미가 희미해집니다. 할 수 있는 것이 점점 줄어들게 되고 주변에서 누군가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 마음이 아픕니다. 그것을 놓아줄 준비가 되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불사신이 아니었음을 인정하는 순간이 아쉬우니까요.
그래서 나는 나와 절교하려고 합니다. 부지불식간에 형성된 나도 모르는 나의 자아, 사회적으로 알맞게 조직된 내 생각 세포들의 자율적 과잉 성장을 잘라내고 싶습니다. 내 의식 저변에서 버티며 언젠가는 나를 배반할, 비정상적으로 자라나는 덩어리를 말입니다. 내가 나를 배반하기 전에 내가 먼저 나와 절교해야겠습니다. 그것이 용기이며 사랑일 겁니다.
P.S. 그녀는 이삿짐을 정리하면서 어딘가에서 불쑥, 마법처럼 보석이 들어있는 상자를 찾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녀는 여전히 보석을 보며 즐거워한답니다. 물론, 귀걸이, 목걸이, 반지로 우아한 세계를 만끽하면서요. 그런데 이번에는 친구를 버렸답니다. 어느 날부터 친구의 연락처를 차단해 버렸다는데…, 그녀는 왜 그런 결정을 했을까요. 혹시, 보석처럼 그 친구를 찾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