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러프레이즈(paraphrase)

by 남쪽맑은물

이승우의 『고요한 읽기』에서 성경 인물 권력자 느부갓네살 왕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한 꿈에서 깨어 보니 꾸었던 꿈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왕은 자기가 꾼 꿈이 무엇인지를 마술사, 주술가, 점쟁이, 점성가에게 묻는다. 도대체 내가 어떤 꿈을 꾸었는지를. 그런데 자기가 무슨 꿈을 꾸게 될지를 말하라고 명령한다면, 더 황당한 일이다. 세상에는 이상한 권력자가 많다. 자기가 못하는 것을 남에게 시킨다. 그리고 마치 자기가 한 것처럼 꾸미는 권력자. 능력 있는 자를 곁에 두는 것이 권력자의 힘이기도 하니까.

꿈을 해몽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꿀 꿈의 내용을 알아맞히라는 명령을 내리는 사람 정도면 도대체 얼마나 무능한 권력자인가. 그런데 그런 어마어마한 일을 수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 신비스러운 능력의 소유자는 바로 신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 이쯤에서 ‘꿈은 신이 보내는 연애편지’라는 말을 생각한다. 신의 아리송한 연애 심리를, 그 야릇한 감정을 사람이 해석한다. 신이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이 꿈이니, 신과 연애를 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이 꿈을 해석하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사람은 자기감정을 면밀히 들여다본다. 불가해한 혼란한 마음을.


그림책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무화과』(크리스 반 알스버그 글, 그림/ 미래M&B)에서 자기가 꾸고 싶은 꿈을 꾸기 위해 애를 쓰는 치과 의사 비보 씨를 만날 수 있다. 우연히 할머니가 준 무화과 두 개 중 하나를 먹은 다음 날, 지난밤에 꾸었던 꿈과 똑같은 일이 현실에서 일어난다. 속옷만 입고 산책을 나갔던 비보 씨는 현실에서 속옷만 입고 산책을 다니다 사람들의 눈길을 끌게 된다. 꿈에서 휘어진 에펠탑이 현실에서도 에펠탑이 구부러지는 것을 목도하고 있으니…, 비보씨는 당황하고 놀란다. 그리고 생각한다. 꿈이 현실이 되는 이 요상한 세계를.

비보 씨는 원하는 대로 꿈꾸기 위해 연구하고 설계한다 그리고 연습한다. “비보는 세상에서 가장 부자다”라고 거울을 보며 마치 마술사처럼 주문한다. 정말로 비보 씨는 원하대로 꿈을 꿀 수 있게 된다. 매일 멋진 요트와 자가용 비행기를 가지고 있고 지중해에 궁궐 같은 집을 가진 부자가 된 꿈을 꾼다. 드디어 오늘이다, 라는 날에 남은 무화과를 먹는다. 그런데,

함께 사는 개 마르셀이 냉큼 먹어버린다. 화가 난 비보씨는 마르셀에게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뜨거운 맛을 보여주겠다고 벼른다. 그러나 다음 날, 비보 씨는 자기 침대가 아닌 침대 아래에서 잠을 깼다. 비보 씨는 또 다른 비보 씨를 본다(비보 씨는 개 마르셀이 되었다). 비보 씨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지만, 멍멍 멍멍, 개 짖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꿈이 현실이 되는 것은 정말 꿈같은 일이다. 현실이었으면 하는 꿈같은 생각을 온종일 한다면 몽상가라 할 것이다. 그러나 비보 씨처럼, 꿈꾸고 싶은 것을 주문을 걸듯이, 생각하고 생각하면 꿈에서 그것을 보기도 한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읽지 않았어도 우리는 무의식의 욕망과 갈등을 반영한 것이 꿈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니 하루 종일 생각했던 일을 꿈꾸는 것은 있을 법한 일이다. 그러니 일어났으면 하는 일을 순간순간마다 생각하다 보면 그대로 되었다는, 성경의 느부갓네살왕이나 동화책의 비보 씨의 이야기에 공감한다. 그러나 온종일 생각한다는 것이 욕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과 그리움일 수 있고 염려와 걱정일 수 있고 미움과 의심일 수 있다. 무엇을 자꾸 생각한다는 것은 되풀이하는 말과 다르지 않다. 마음 밭에서 사라지지 않는 감정들처럼.

생각은 엄청난 힘이 있다. 매일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면 일상이 생각과 비슷한 일로 채워진다. 의심하는 나날이 지속하면, 의심할 일만 일어난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세상에 오로지 혼자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는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생각 늪에 빠져버린다. 늪은 나쁜 꿈이 된다. 자꾸 늪에 빠져들수록 악몽에 시달린다. 너무 의심하고, 너무 미워하다 보면, 나쁜 마음이 퍼져서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미움과 의심 속에서 점점 미워하는 마음이 확장되고 의심스러운 일이 자꾸 생기게 된다. 그러다 보면 불면의 밤을 보내게 되고 혹시 잠을 자더라고 불안한 꿈 때문에 화들짝 깨어난다.

꿈은 비밀스럽다. 자기가 말하지 않으면 자기만 아는 이야기다. 그런데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오로지 자기만 꿀 수 있는 꿈이기에, 절대로 꿈을 대신 꾸어줄 수 없기에 신묘한 이야기를 타인에게 들려주고 싶어진다. 꿈을 해석하고 분석할 때, 자기 이야기가 확장되기 때문이다. 꿈에서 어떤 계시를 찾아내는 신비스러운 능력을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이 생기기도 하니까. 그것이 신묘함인지 현명함인지 영험함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반적이지 않은 특별함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그 이상 진전은 없다. 꿈을 해석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자유의지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동화 속 주인공 비보 씨처럼, 매일 생각하는 것을 꿈꿀 수 있다면, 그 꿈이 현실이 된다면, 세상은 달라질 것이다. 아마도 선과 악의 대립이 더 막강해질 것이다. 생각을 조종하려는 선과 악이 꿈의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전쟁을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정의는 새롭게 쓰일 것이며, 실용적 담론은 우후죽순처럼 새로운 지침서가 되어 많은 이에게 사랑받을 것이다. 꿈을 꾸기 위해 온종일 그 생각만 하다가 실수가 잦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꿈꾸기만을 목표로 삼는 세상에 어울리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면서 자본 시장이 삐거덕거릴 지도 모른다. 더구나 어떤 생각이 꿈이 되고 그 꿈이 현실이 되는지를 AI가 알려 주고 정보가 확산하면서 비슷한 꿈을 꾸기 위한 비슷한 생각만 할지 모른다.

이쯤이면, 자본에 찌든 디스토피아적 현실이 사라질까, 희망이 너덜너덜한 현실이 되는 고문이 사라질까, 라는 질문이 생긴다. 그러나 꿈에 휘둘리지 않으려는 정신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너무나 사적인 꿈이 너무나 일반화되어 꿈에 대한 신비로움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오히려 소중한 정체성을 지킬지도 모른다는 꿈. 다양한 생각으로 축약된 예술 같은 사유를 놓치지 않으려는 꿈. 그런 꿈을 꾸는 사람도 많이 있을 테니까.


꿈을 쉽게 풀어내는 것이 해몽이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 쉽게 풀어내는 것, 이미 쓰인 것을 다시 설명하는 것. 이미 읽은 것을 번역하는 것. 꿈은 자의적 해석이, 우의적 해석이 가능한 영역이다. 꿈꾼 자만이 알 수 있는 알레고리가 있다. 낯선 것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는 신호다. 이쯤에서 태몽처럼, 꿈을 남이 꾸기도 한다는 말이 과연 사실일지 궁금하다. 꿈을 나 대신 다른 사람이 꾸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 내 삶을 내가 살아가듯이, 꿈도 내가 꾸어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꿈을 은유로 바꾸어서 말한다면 어떤 낱말이 적절할까. 욕망이나 갈등, 희망이나 이상, 기대나 생각 등등 뻔한 말 말고. 모든 생태의 모양과 색이 사라지고 움직이는 것이 멈추고 멈춘 것이 움직이는 어둠 속에서 꾸는 꿈이 신이 보낸 연애편지처럼 바꿔 말하고 덧대 말하는, 신선하고 아름다운, 눈이 번쩍 뜨이고 귀가 쫑긋한 문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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