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

by 남쪽맑은물

길을 잃어 본 적이 있는가. 목적지를 찾으려고 할수록 그 자리에 빙빙 돌고 있는 자신이 낯설어 더럭 겁이 났던 일들. 길을 잃어버린 경험이 없다면, 이 이야기는 풍문이나 잠꼬대로 들릴지도 모른다. 이야기란, 지금까지 한 적이 없기에 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와 지금까지 해왔던 이야기라서 또 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아우르는 무한한 세계다. 그 세계는 지극히 개인만이 아는 이야기라서 그리 중요하지 않거나, 들을수록 지루해서 딴청 피우게 되는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런데 개인적이고 중요하지 않고 재미없는 이야기가 고요하고 거룩한 천사들 이야기일 수 있지 않은가. 천사가 하는 일이 우리들 삶과 그다지 다르지 않을 때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곤 길을 잃게 될 것이다 / 가방에는 별로 든 것이 없을 것이므로 //
다시 길을 잃은 다음 // 돌아오지 않는다면 인생이 명백해질 것이다 /
‘청춘에게’『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이병률 / 문학과지성사, 2024)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곳에서 길을 잃었는지 그녀 자신도 의아하다. 꼭 꿈속에서 헤매는 기분이랄까. 절대로 길을 잃을 것 같지 않은 곳에서 생긴 일이지만, 그 기억이 사라졌다 다시 살아나기를 반복하면서 이제는 중단할 수 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가려던 거리가 미로처럼 엉켜버려 어떤 갈림길에서 망설이다 선택한 길이 또다시 미로였던 이야기. 가고자 하는 길을 찾지 못하고 막다른 골목길에 들어선 기분. 마침내 눈에 눈물이 맺혀 또르르 굴러 내려와 마음으로 흐르던 액체 덩어리의 떨림.

길을 잃은 곳은 시장이었다. 아낙은 비닐로 덮어 놓은 순대 더미를 드러내며 먹고 가라고 손짓했다. 내용물이 투명하게 보이는 순대 가락이 좌판에 펼쳐진 순대 골목을 지나 생선 골목과 어묵 가게를 스쳐 갔다. 그릇 가게를 지나치고 분식집이 늘어선 거리에서 나오니 다시 순대 골목이었다. 목적지로 가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가리고 걸었을 때 방향감각을 상실한 사람처럼, 아무리 걸어도 시장 안을 뱅뱅 돌고 돌뿐, 익숙한 길이 나오지 않았다. 윤형방황(輪形彷徨)이 일어난 것이다. 튀김 가게 앞에 있는 사람에게 택시 탈 수 있는 곳을 물어서 가 본 길이 또다시 순대 골목이었으니. 갑자기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다.

K와의 헤어짐은 혼돈이었다. 잠에 취해 보기도, 무작정 걸어 보기도, 음악에 마음을 섞어보기도 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K가 보고 싶어 K의 동네를 두리번거리다 들어선 시장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그녀. 이 어처구니없는 사실을 알고는 맥이 빠져버렸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어쩌면 K와 함께 했던 무의식이, 시장에서 순대를 먹고 만두를 먹었던 지난날이, 우연이라도 K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그녀의 발걸음을 이끌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K를 다시 만나는 일은 없었다.

살아가는 일들이 정해져 있다면, 고민하고 고심하는 일이 정해진 길을 가기 위한 거라면 고민하고 고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정해진 길로 가면 되니까. 그러나 술기운을 빌려 발설하는 헛소리처럼 들린다 해도 정해진 삶이라는 논리부터 제정신이 아니지 않은가. 의외의 생각은 의외의 일을 만들기에 의외의 일은 의외의 순간에 일어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오히려 신이나 운세, 예감이나 예측은 의외성에 혼란을 일으키는 요소가 아닐까. 삶은 실제 이야기지만, 허구를 데려와 삶을 각색하기에 그 실재와 허구의 불꽃 튀는 신경전은 격렬하다. 그러나 노력과 상관없는 이상한 힘은 생각보다 강할 수 있기에 인간은 불안하다. 그래서 신을 찾는다.

어떤 이는 이러한 힘을 타력(他力)이라고 한다. 눈에 보이지 않으나 자기 이외의 어떤 힘이 자기 삶에 침투해 작용하는 모든 것이라는 말이겠다. 한 치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이래서 그랬구나!’라는 현실이 눈앞에 펼쳐질 때, 복제화 된 자아로 현실을 보듯 지나간 일에 고개를 주억거리는 현상 같은 것. 안 되는 일은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진 일이었다는 자조 섞인 생각이 허구를 삼켜버린다. 이래서 사람은 회의론자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다가 웃는다. 만일 타력이 있다면 어떤 힘을 원하고 어떤 힘을 두려워하는가.

다른 사람처럼 그녀도 부쩍 미래가 궁금할 때가 있다. 지난밤 꿈속에서 일어난 일이 미래에 대한 신호가 아닐까, 사라지지 않는 쓸모없는 기억을 끝까지 붙잡으려 하는 것이 미래와 연결된 징표가 아닐까, 뜬금없이 나타나는 기억이 다가오는 삶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때는 하루가 길다. 투명한 그릇에 담긴 액체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이 미래를 예언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면 아늑한 상념 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혼령을 보는 기분이 들곤 한다. 그러다 보면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의 삶은 어떨지, 의외성에서 생성되는 의외의 삶이 궁금해진다. 이런 이상야릇한 생각이 또 다른 생각을 데려와 수수한 호기심으로 풀썩거린다.

그녀는 언젠가 포구에서 길을 잃었던 일이 잊히지 않는다. 그 생각에 머물면 머리가 빙빙 돈다. 횟감을 사러 갔다가 일행과 헤어졌다. 휴대전화로 알려준 위치를 찾으려고 했으나, 약국 주위만 몇 바퀴 맴돌았다. 지도 앱이 흔하지 않았던 시기였지만, 이미 방향 감각을 잃었기에 아마 앱이 원활하게 작동해도 길에서 빙빙 돌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떼 지어 나오는 길 어귀를 바라보며 약국 앞에 서서 익숙한 얼굴을 기다리던 시간. 저만치서 바쁜 걸음으로 걸어오는 일행을 보고는 안도했던 순간. 졸음이 물결처럼 밀려왔다.

길눈이 어두운 그녀는, 다른 사람보다 몇 곱절 애써야 길을 잃지 않는다. 정신 바짝 차려도, 노력과 상관없어 보이는 이성과 지성을 작용시켜도 변함이 없다. 정해진 길을 잃어버리니 인생에서도 그녀가 가야 할 길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그리운 얼굴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다정한 목소리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친근한 발걸음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웃는 것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눈 뜨는 것을 잃어버리지 않을까라며 걱정하고 심각해지곤 한다. 그러다 안도한다. 인생에서 정해진 길이 어디 있으랴. 심사숙고하든, 부탁하든, 약속하든, 횡설수설하든, 신뢰하든, 중단하지 않는 한 그녀의 삶이 길을 만들지 않겠는가. 그 길이 그녀의 길이 되지 않겠는가.

앞으로는 세상이 더욱 높고 깊고 크고 넓고 복잡해지기에 자주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때마다 의외의 상황이 의외의 길을 만들 것이다. 의외의 사람을 만나면서 의외의 관계가 생성될 것이다. 그녀를 떠난 사람들과 그녀가 떠난 사람들, 그녀를 만난 사람들과 그녀가 만난 사람들,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들. 그녀의 삶이 그들 주위를 빙빙 돌고 돌아 나에게로 돌아오는 길이 오리무중일지라도 제 자리를 찾을 것이다. 상투적이고 무책임하게 들릴지도 모를 ‘미아 이야기’는 그녀의 삶이 지속하는 한 계속될 것이다. 그러다 다시 길을 잃은 다음,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때는 명백한 인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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