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사랑

by 남쪽맑은물

경의중앙선을 타고 그녀를 만나러 간다. 약속 시간이 정해져 있지만 일찍 출발했기에 시간이 넉넉하다. 처음 타보는 파주행 경의중앙선. 연락이 끊겼던 그녀와의 만남은 그동안 퇴적한 세월로 특화된 지난 생각에서 탈주하게 한다. 과거를 생각하는 것을 그리 즐기지 않지만, 지난 시간이 주는 여유를 즐기는 것을 마다하지는 않는다. 심장이 찔리는 일도 무덤덤하게 변해 버리고 수런거리는 부끄러움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기억들. 서로를 찬란하게 기억하는 관계가 아니었는데도 막상 길을 나서니 이유를 대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좋은 감성을 만난다. 마치 꽃 같은 시절의 그리움 같은 것. 수평으로 사라진 기억이 수직으로 내리꽂는 햇살처럼, 봉긋하게 올라오는 꽃대처럼, 마음을 찌르르하게 한다.


그녀의 얼굴. 얼마나 변했을까. 약속한 시간에 그녀를 만날 것이고 그녀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이야기할 것이다. 이상기온으로 6월이 매우 덥지만 그런 더위조차 그리움을 방해하지 못한다. 젊음을 함께 했던 그녀와 꼭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꼭 묻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는 하다. 그때 왜 그랬냐고. 그녀와 내가 서로 모른 척해야 하는 사건은 아닌데, 그때는 묻지 못했다. 그녀에게 묻는 행위는 그녀의 마음을 검증해야 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상상한 것이 현실이 될까 봐. 온갖 이유를 만들어 그녀가 정당성을 입증한다면, 나의 비참함이 깃발처럼 온 세상에 펄럭일 것 같아서 외면했던 일.

항상 밤에만 보이는 것이 있는 것처럼, 나를 내팽개친 사랑 이야기는 과거에 딸려 나오는 정서가 한숨으로 이어지는 이야기, 알면서 모르는 것처럼 피해야 하는 어두운 이야기였으나, 이제는 그런 이야기가 그다지 어둡지 않다. 그것은 시간이 충분히 흘렀다는 증거이리라. 도망치듯이 벗어난 사랑이지만, 지금은 나의 사랑이 밋밋한 이온음료 맛과 비슷해졌고 사랑이 밥 먹여주냐는 식의 신포도 타령하는 이솝우화의 여우처럼, 스스로 합리화하는데 이력이 났다고 할까. 이제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도 괜찮을 것 같은 무덤덤이 빗나간 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조차 그다지 의미가 없다. 번역해야 할 사랑도, 속살을 드러내야 하는 서사도, 꾸며내야 하는 이미지도 아니니까.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백마역을 지나면서 무덤덤한 마음이 몇 개로 잘리면서 제각각 움직이고 있으니. 이 백마역이 그때 그 백마역이니? 라고 그녀에게 문자를 보내니 그렇다는 답장이 온다. 갑자기 등으로 흐르는 열기가 체온을 상승시킨다. 더위를 식히기 위해 냉방기가 돌아가고 있음에도 내 등은 찔끔찔끔 땀으로 젖는다. 아, 경의중앙선이 백마역을 지나가는구나. 마치 술 취해 무의식으로 중얼거리는 읊조림 같은 침식이 일어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젊은 날, 종종 신촌역에서 교외선을 타고 가던 곳이 백마 화사랑이었다. 빛이 들지 않는 날이 없었을 만큼 화사했던 날들이었다. 팽창하는 감정을 주고받으며 헤매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날들이었다. 청춘을 담보로 명백함보다는 격렬함을 열렬하게 환호했던 날들이었다. 사랑에 대해 자상한 가르침이 필요하지 않았던 날들이었다. 명치가 아픈 사랑에서도 불균형의 아름다움을 몸으로 체득하던 날들이었다. 많은 것을 갖지 않은 날들이지만, 그 사랑이라는 감정 하나로 충분해 그 감정에 취해서 눈물이 많았던 날들이었다.

함께 기차를 타고, 함께 논길을 걷고, 함께 하늘을 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도착한 화사랑에서 P와 나는 동동주를 마셨다. 술이 얼굴을 붉게 물들일 때쯤, P는 나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그때 나를 바라보던 P의 눈동자를 기억한다. 조수간만처럼 끊임없이 들고나는 삶의 의미를 붙들려는 안간힘과 만물상같이 새로운 동력을 수집하려는 검은 눈동자를. 내가 먼저 화사랑을 나왔던 것 같은데, 기차를 혼자 탔는지, P가 뒤따라 나왔는지, 그래서 기차를 함께 탔는지, 함께 탔지만 각자 돌아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P와 나는 헤어졌고 더 이상 만나지 않았다. 좁은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일 같은 것은 없었다. P의 그녀가 그녀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내가 그들을 떠났으니까.


경의중앙선은 바쁠 것 없이 속도를 맞추어 걷는 둘레길 같다. 지하가 아닌 지상을 지나는 전철은 둘레길 걷는 것과 비슷한 한유함이 있다. 여름을 향한 전철 밖 여름 풍경이 고즈넉하다. 전철 내에서도 느껴지는 바람의 흐름, 흐름에 몸을 맡기는 나무, 나무 가지와 나뭇잎의 흔들림, 구름이 흘러가는 움직임으로 유장함을 증명하는 하늘, 그 풍경 사이로 들리는 듯한 건설 현장의 거친 소음, 덜컹거리는 전철은 모든 외부의 움직임에 답하듯 작은 미동에도 반응한다. 마치 흔들리는 사랑처럼.

파주로 갈수록 만나게 되는 철조망은 이성으로 와닿은 현실 이미지로 다가온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웃기고 슬픈 현실을 가끔은 비웃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을 아는지, 나를 쑤시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익명의 외부 세력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너머에 펼쳐진 녹음은 역시 철조망을 조롱하듯 초롱초롱한 색들을 내뿜는다. 나는 한가하게 그 조롱에 동조하는 눈빛을 보내다 살짝 웃는다. 누가 눈치챌까 봐 두리번거리며 조롱에 조롱으로 대응하면서, 그것이 조롱일지라도 조롱이 될 수 없는 사랑을, 참패의 흔적이 조롱거리의 삶이라고 할 수 없음을 항변한다. 코로 웃으니 약간 민망해진다. 그러다 목적지 안내 방송에 내 몸을 챙기며 창에 비치는 나를 보니 음식물을 먹다가 흘린 흔적을 닦으려는 표정이다.


그녀가 개찰구 밖에서 손을 흔든다. 큰 키 덕분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그녀. 나도 손을 흔들며 그녀에게 다가간다. 백마를 지날 때, 기분이 묘하더라. 맞아. 나도 여기로 이사 오고 나서 백마를 지날 때마다 한동안 그랬어. 그때는 뭐가 그리 심각했는지. 심각한 일이었지, 그림 같은 사랑인데. 화가 나는 사랑이 아니라? 그런가? 그녀와 나는 웃었다. 참으로 긴 시간이 흘렀다. 우리가 나눌 이야기가 구불구불 눈앞에 펼쳐진다.

그래, 걷자. 발길 가는 대로, 세상에서 얼마나 망가지다가 지금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그나마 이럭저럭 살아가고 있는 이야기를 하다가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하겠지. 그게 P라 해도 상관없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지만, 그만그만하게 살아가고 있을 이야기의 주인공이 P만 있는 것은 아니니. 영웅도 악역도 아니며 운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며 바보같이 착한 것도 아닌 내 옆을 스친 사람들. 그녀와 나는 그림 같은 사랑 이야기보다 그림 같은 얼굴을 마주 보는 오늘에 감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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