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문학나무] 스마트 소설
여자는 성큼성큼 맨발로 걷는다. 모래사장에 찍힌 발자국이 밀려오는 파도에 사르르 사라진다. 그러다 남은 흔적 귀퉁이. 형체가 점점 작아진다. 아무리 포기해도 소용없는 고통스러운 기억처럼 파도에 쓸리지 않고 남은 발자국은 기억을 남기고 결국 사라질 것이다.
여자는 걸음을 멈춘다. 바다를 향해 우뚝 서서 밀려갔다가 밀려오는 파도를 응시한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마치 결투를 청하듯.
여자는 부서지는 파도처럼, 파도에 씻겨 깨끗해지는 갯바위처럼, 햇발이 튕겨 나가는 모래 석영 결정체처럼 그리운 얼굴을 생각한다.
남자는 죽었다. 지루함이 극에 달하는, 갑자기 중단된 생각이 침묵으로 이어지는 바다에서. 이어진 침묵이 조용한 슬픔을 자극하는, 어떤 논리를 망각한 추상으로 가득한 바다에서 발견한 그의 주검. 파도는 마치 윤회처럼, 죽음을 추모하고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다.
떠났던 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의식은 무엇일까. 일상에 적응하다 보면 떠났던 곳을 찾는 일이 미루어질 때도 있는 법, 미루다 보면 모양 없는 감정이 생겨 어색해질 때도 있던데. 과거 기억이 모호하고 무한해 편집하고 싶은데 외적 기억과 내적 기억 혼선으로 도통 오리무중일 때, 괴롭다. 그러다 사진 보는 것처럼 까맣게 잊은 듯한 단편 사건이 불쑥 마음을 뚫고 떠오른다. 방향을 찾지 못했던 의식이 선명하게 보이는 기억 창으로 고통을 마주할 때, 비틀거린다. 감정에 취한 것도 아닌데 자꾸 휘청거린다. 여자는 모래사장에 털썩 주저앉는다.
남자는 어둠 속에서도 아침이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달과 친숙한 바다 속성을 잘 알고 있었다. 물고기를 몰고 다니는 해류 길목도 잘 알았다. 바람 방향으로도 날씨를 알 수 있으며 바다에서 배 움직이는 일이 사람 힘으로만 가능하지 않다는 것, 그런 생각조차 가당치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바다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 소득 없이 긴 시간을 보낼 때가 있다는 것을 뼛속 깊이 알고 있었다. 바다에서 허탕 치는 일이 연이어 일어나도 잠을 자고 꿈을 꾸었다.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그가 좋아했던 바다 노인처럼, 그는 바다에서 떠도는 꿈을 꾸었다.
남자는 바다에서 인간 존엄을 보여 준 노인을 좋아했다. 어부로서 인간이 어떤 일을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노인을 좋아했다. 어부가 품고 있는 생각은 행동이 되어 바다로 향하지만, 그 미지수에 관한 결과를 받아들이는 노인을 좋아했다. 고기를 못 잡는 날이 여러 날 이어져도, 심신이 힘들어도 바다를 생각하며 잠잤던 노인을,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매번 처음 하는 일처럼 바다에 나가고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 노인을, 변함없이 꾸준히 움직이는 배를 타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듣던 노인을 좋아했다. 그는 노인에 관한 이야기가 얼마나 무궁무진한지를, 지나가는 바람을 보내고 다가오는 바람을 맞으면서 생각했다.
여자는 점점 남자와 나누는 이야기가 재미없었다. 어떤 음모를 꾸미기 위해 비밀을 말하는 듯, 작은 소리와 망설이는 남자 말투에 흥미가 일지 않았다. 특히 중요한 것을 말할 때 튀어나오는 그만의 악센트가 점점 지겨워지고 있었다. 여자는 허공으로 중요하지 않은 시선을 던지며 그가 하는 말을 흘려들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잘 들어야 했다. 남자를 말려야 했다. 꿈에도 몰랐던 일이지만, 남자를 떠나게 내버려 두면 안 되었다.
부고 소식은 벼락같이 왔다. 여자는 숨이 막히고 머리가 아프고 공포가 몰려왔다. 공포는 죽음이었고 바다였다. 바닷가 어디쯤에서 발견되었다 했다. 기가 막힌 소식을 듣고 서둘러 갔을 때, 모습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어 마치 낯선 도시에서 만나는 유령 같았다. 그러나 틀림없었다. 남자를 알아볼 수 있는 실오라기 같은 손가락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데 정말 남자가 맞는 것인가. 왜 이 먼 이국땅에서 하필, 바다에서 남자는 죽어야 했을까.
어학연수 하면서 돈도 벌 수 있어 좋은 경험이라 했다. 많은 한인 학생이 일하는 마트에서 일한다고 했기에 그런 줄 알았다. 앞으로 가지고 있는 평범한 의식으로 잘살아 보겠다고 했다. 헛되이 노력하는 일이 있다고 해도 흐리고 차가운 수평선 너머 해가 솟는 것처럼 밝은 빛으로 살겠다 했다. 적극적인 삶에 대한 도전은 지금이며 그 시기가 꼭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비록 가볍게 스치는 시간이어도 괜찮다고 했다. 남자는 어딘가에 놀라운 사실이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말했고 여자는 침묵했다. 그런데 지구 반대편, 바다에서, 남자는….
여자는 깨닫지 못한 남자가 한 말을 생각한다. 꾸벅꾸벅 졸음이 오는 것을 참으며 전화를 기다렸던 늦은 밤, 남자가 전하는 습한 목소리가 무슨 꿈을 꾸고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바다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전화 목소리로는 가늠할 수 없는 차분함을, 점점 밝아 올 아침 빛이 남자가 바라는 휴식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를 고독을. 남자는 잠에 빠져든 아기 숨소리처럼 편안하게 말했지만, 남자가 하는 말은 자기 몸을 다독이는 즐거움보다는 피곤한 몸을 추스르는 안간힘이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여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법한 남자 이야기가 사실이어서 바다에서 사투를 벌인 노인을 생각한다. 남자는 바다에서 고기 잡는 노인처럼, 어쩌면 식탁에 남은 빵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며 도망가는 고기를 유인할 생각에 몰두하면서 패배할지도 모를 자기 얼굴 보며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삶을 다독였는지 모른다. 매일 떠오르는 해를 생각하고 어디로 지나갈 바람을 생각했는지도. 해류 흐름에 불안을 흘려보내며 간절한 마음을 붙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남자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빈 깡통처럼 발길에 부딪히는 일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지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그 무엇을 찾으려 바다에 갔는지도 모른다
눈을 감는다. 바다 내음이 무언가 시작하려는 예언처럼 다가올지 모르니까. 모래 사각거림이 남자 목소리일지 모르니까. 출렁이는 파도가 지구 반대편에서 들리는 외침일지, 속삭임일지, 흐느낌일지 모르니까.
모래사장에 보따리처럼 덩그러니 놓인 여자는 모래성처럼 부서진다.
그 누가 통곡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