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이 되면 식물을 키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선생님들이 대학만 가면 살이 빠진다(혹은 찐다) 거나 연인이 생긴다는 이야기는 농담으로만 여겼으면서, 대학에 가면 여유시간이 있을 것이며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말에는 이상하리만치 굳은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아침 8시 반부터 밤 11시까지 입시 공부만 해야 했던 학교와, 화분 하나 놓을 자리도 마땅치 않았던 기숙사 방을 벗어난다면, 당연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야 맞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연고 없는 서울에서 힘들게 구한 자취방에 들어선 순간, 나는 대학에서도 원하는 만큼 식물을 기를 수 없을 거란 사실을 직감했다. 그 방은 눕기 위해서 의자를 책상 위로 올려야 할 만큼 작았고, 북향으로 난 작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은 내가 키우고 싶은 식물을 키우기에는 한참 부족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창 밖으로 작게 돌출된 공간이 있어서, 아쉬운 대로 어두운 이곳에서도 잘 자라줄 듯한 스파티필룸과 아디안텀을 올려두고 길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군부대 생활관에서, 그리고 새 자취방과 그 이후의 대학 기숙사에서도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지금 쓰는 작업실은 훨씬 나았다. 비록 서향이지만 해가 떠 있는 시간 중 절반은 해를 받을 수 있으니까. 창문 높이에 맞는 서랍장과 책상을 두고 가끔씩 이중창의 불투명한 유리를 떼어 더 많은 빛을 확보하면서, 나는 여러 식물을 기르기 시작했다. 시인의 이름을 가진 ‘베넷 브라우닝’ 수선화와, 내 키만 한 높이에 희고 향기로운 꽃을 피우는 백합 ’카사블랑카’, 한 포기로도 작은 정글이 되었던 보스턴고사리와 요즈음 인기가 많은 필로덴드론 글로리오섬과 베고니아 마큘라타. 모두 이 작업실의 작은 창문 덕분에 키워낸 식물들이다.
다만 한여름마다 오래되고 작은 이 건물은 통째로 달아올랐고(물을 틀면 그냥 따뜻한 물이 나온다), 그때마다 식물은 몇몇은 무르고 시들어갔다. 또, 겨울 해가 지나는 자리에 높은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겨울마다 따뜻한 햇빛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이 단 몇 시간으로 줄어들었다. 외풍도 심한데 햇빛까지 부족하다니. 라디에이터를 틀어두긴 했지만, 냉해를 입은 식물 한 두 포기는 매년 겨울과 함께 떠나보내야 했다. 이곳 역시, 식물을 키우기에 최적의 장소는 아니었던 것이다.
언젠가, 식물을 기르기 좋은 집을 가질 수 있을까? 동남향에 해가 잘 들고, 크고 탁 트인 베란다가 있으며, 단열과 냉방, 보온이 잘 되는 아파트. 나무 몇 그루를 심을 수 있고, 작은 텃밭과 화단을 가꿀 수 있는 주택이라면 더 좋겠다. 작은 온실까지 바라는 것은 욕심일 것 같고. 다만 집 가격은 내가 일해 벌어들이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오른다. 내가 지내는 서울이라면 더더욱 빠르게. 끝없이 치닫는 집의 가격과 나의 통장 잔액을 비교할 때면, 나의 첫 자취방에 있던 작은 창문이 떠오른다. 내가 원하는 대로 식물을 기를 수는 없겠다는 사실을 또다시 직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식물을 기르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래서 집을 생각하는 대신 식물 생육에 필요한 여러 도구들을 사 모은다. 생육 환경 확인을 위한 온습도계와 광량 체크용 앱, 환기를 위한 서큘레이터, 혹독한 겨울을 조금이나마 따뜻하게 해 줄 라디에이터, 건조한 공기에 잎이 상하는 걸 막아줄 가습기와, 무엇보다도 중요한 햇빛을 대신해줄 식물용 전등 여러 개. 크고 좋은 집을 사는 일은 어렵지만, 이 작고 확실한 도구들은 식물이 자라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또, 내가 만들어줄 수 있는 환경의 범위 안에서 잘 자랄 수 있는 식물들도 꾸준히 시도해보고 있다. 야생화, 작은 꽃나무, 지중해산 허브, 구근식물, 양치식물, 식충식물과 열대 관엽식물까지. 여럿 실패했지만, 다행히도 고사리와 열대 관엽 식물들은 험난한 작업실 환경에서 잘 자라주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식물을 기르기 좋은 집은, 가난을 벗어날 확률이 낮은 그림작가인 나에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가드닝은 식물 생육을 위한 전구나 서큘레이터 같은 도구들을 사모으는 일, 그리고 그런 환경에서 잘 살아줄 수 있는 식물들을 찾는 일이 될 것이다. 꾸준하고도 끊임없이. 얼마 전 마음에 쏙 드는 원종 호접란과 연보랏빛 카틀레야를 발견했다. 이들이 어떤 환경을 필요로 하는지, 그리고 내 방에서 그 환경을 맞춰줄 수 있을지 따져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