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관을 찾은 바늘 위로 주렁주렁 매달린 병들에서 '똑똑' 방울이 맺혀 떨어지고 있었다. 도려낸 곳들이 불로 지지는 듯 고통스러워 빠드득 이를 갈며 몸을 뒤틀었다. 날카로운 한기가 관절마다 박혀 살점을 물어뜯었고, 이불의 끄트머리를 부여잡고 버티는 손가락들을 오독오독 씹어댔다.
*
신문로 집에서의 안락함이 채 일 년을 못 가고 누수가 시작되었을 때, 집주인은 방수공사할 돈도 보증금을 돌려줄 돈도 없으니 그냥 양동이 놓고 더 살라며 단호했다. 그렇게 8개월을 더 콜록거리며 있다보니, 집은 온통 검은 곰팡이와 썩은 석고보드 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게 다 집 없는 설움이죠."
벽지안 집 구조물까지 손상이 있는 것 같다고, 어서 누수를 잡아야할 것 같다고 집주인에게 다시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녀는 내게 여지껏 집도 안사고 뭐했냐며 핀잔을 주었다. 집 없는 설움이란게 다 그런거라며. 그렇지만 이 좋은 동네에 있는 자기 집에서 살게해주었으니 고맙지 않냐고.
매일을 소주나 찌끄리다 결국 이사를 결심했다. 내용증명을 보내고 임차권 등기를 예고하고 나니, 집주인은 2주 남짓 촉박한 기한을 주고는 보증금을 돌려줄테니 그때까지 집을 비우라고 했다.
"너를 데려갈 수 없어. 미안해."
그 집에서의 마지막 날, 마당 아이가 좋아하던 캣차우를 먹이고 도망치듯 짐을 싸서 나왔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 해 두 번의 이사를 더 해야만 하게되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이후의 두 집 또한 심각한 누수가 있어 짐을 풀어 살아보지도 못하고 나와야 했다.
큰 하자가 있으니 집을 빼는데도 매번 애를 먹었다. 두번째 이사한 청운동에서, 어느 날 집안으로 파도가 밀려들어오는 꿈에 놀라 깨었다. 그날, 집은 새 세입자를 찾았고, 나는 암환자가 되어 일상에서 뜯겨나갔다.
무섭게 망가져가는 그 집들을 빠져나올 때마다, 나는 오래된 절망을 점점 더 꽉 부여잡았다. 자기 연민이 둥지를 틀었고, 자꾸만 그 안에 숨어서 안락함을 찾고자 했다. 말이 되지 않았음에도 나는 속을 파고들며 아파하기만 할 뿐, 도무지 다시 용기를 내지 못했다.
난 너무 어리석었다. 단 한 번의 안락함, 그 일 년이 그렇게 끝나버린 것이 마치 내 모든 것의 결말인 것처럼 확신하고 절망하기만 했다. 스스로 용기를 내어 벗어나본 경험을 좀 더 소중히 대하지 못했다. 그저 사는 것이 그런 것이고, 차근차근 풀어가면 어떻게든 살아지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지도 못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내게는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그래서 어떤 몸으로 살아가게 될까? 언제부터 미래를 꿈꾸고 계획해도 되는 것일까, 그 계획은 6개월 이내여야 할까 아님 그 이상이어도 되는 것일까...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기에, 계획했던 일들은 그 자리에서 멈추거나 폐기되었다. 아무런 연고도 기대도 없는 집을 입원 전에 가까스로 구했고,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아프고 망가지기 시작했다.
종종 섬망에 빠지는 날들이 있었던 것 같다. 울컥울컥 좁은 틈새로 빨려들 듯 미끄러져 떨어지는 느낌이 자주 들었고, 바닥에 당도해 일어섰을 때 느껴지던 내 흔들림, 협곡을 달려오던 바람, 자작나무 숲소리, 꽁꽁 언 큰 호수에 미끄러지던 별들, 그리고 무수한 사연들......
나는, 우리는 그곳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별들이 부르르 떨다가 떨어졌고, 호수에 미끄러지며 눈물부터 쏟았다. 그리고, 그간의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어느 날 낯선 느낌에 눈을 떴을 때, 큰 물길이 우리 사이에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이내 무거운 물속에 모두 잠겼고, 나는 숨이 막혀 괴로워하다 물 위로 있는 힘을 다해 떠올랐다. 물 밖으로 큰 숨을 내뱉으며 나는 수술실에서 일찍 깨어났고, 베드에 묶인 채 몸부림치며 울고 있었다.
섬뜩하고 차가운 눈물이 목덜미를 그으며 뒤통수에 고였다.
우린, 그 시절과 나는 영영 이별하였다.
*
시간은 늘 약한 틈새를 찾아 균열을 만드는데, 물방울은 왜 저렇게 맺히는 것일까? 얼마나 사무치기에 동그랗게 몸을 말아 버티고 버티다 떨어지는 것일까?
밤새 수많은 물방울이 맺히고 떨어지며 '텅! 텅!' 울려대는 소리에 몸이 떨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뒤척이고 뒤척여도 위안 삼을 추억거리 하나 없어 자꾸만 소스라치게 되는 고된 밤이었다.
슬픔은 머무르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현재의 것들이 나를 떠나 과거로 향하는데, 내가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들을 떠날 수 있는 내 마음을 기다려주고 싶은데, 무엇을 기다리는 것인지 자꾸만 잊게 되는 희미한 날들이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