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모든 두려움을 사양한다'(피에르 레버디의 작품)
2024.6.3.
by
친절한 James
Jun 3. 2024
어디선가 은은한 커피 향이 나는 것 같다.
아마도 그가 주변에 있는 모양이다.
그는 내성적이었다.
다른 사람과 인사하기도 힘들어했다.
일터에서도 동료들에게 매일
어색한 눈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자리에 앉고 일어설 때도,
다른 곳으로 움직일 때도
티 나지 않게, 조용히 왔다 갔다.
만약 당신이
그의 곁에서 식사할 때
눈을 감고 있었다면
음소거 라디오처럼
그가 밥을 먹는지조차
모를 지경이었다.
그의 업무 능력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마감일에 맞춰
마무리를 잘하고
남들이 놓치는 점도
잘 찾아내 고치곤 했다.
생색내거나 거들먹거리지 않고
묵묵히 새로운 방법을 제안하기도 했다.
동료들이 잡담에 빠져있을 때
그는 곁에서 모든 대화를 삼켰다.
격렬한 논쟁이 벌어질 때도
누구 편도 들지 않고 말을 아꼈다.
말수도 적고 행동도 옅은
그는 커피를 좋아했다.
점심 먹고 직장에서
오백보 남짓 떨어진
허름한 단층 카페에서
매일 아메리카노를 홀짝였다.
가끔은 에스프레소도
주문하는 것 같았다.
어느 더운 나라에서 사 온 듯한
팔랑이는 소품이 문 손잡이에 달렸다.
흰 바람개비 같기도 하고
뿌연 거미줄 같기도 하다.
누군가는 드림캐쳐라고도 했는데
다시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손때 묻은 유리문에는
백 년도 더 된 듯한 구름모양
나무판자에 'Open' 네 글자가
휘청거리며 힘겹게 새겨있고,
판자 양쪽 끝에 달린 진홍색 털실에서
햇빛 가루가 살살 흘러내린다.
그는 카페 문을 열 때
이 빛깔의 흘러내림을 좋아했다.
귀찮아하지 않고, 그렇다고
너무 과하지 않은 산뜻한 반김,
그는 처음 오는 손님처럼 들어와
문에서 대각선 쪽 제일 구석
원형 탁자에 살포시 앉는다.
습관처럼 반지르르한
탁자 나뭇결을 슬쩍 쓰다듬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다.
그리고 미소를 담은
작은 한숨을 내쉰다.
바리스타는 그가 문을 열기
바로 전부터 커피 내릴 준비를 한다.
작년 여름, 카페를 열고
세 번의 봄이 지난 뒤부터
찾아온 손님이 바로 그였다.
12가지 메뉴 중 오직 아메리카노만,
가끔 에스프레소를 시키는 손님이다.
시그니처 메뉴인 아인슈페너를 권해봤지만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던 그였지.
기본에서 샷 추가에 찬물 한 숟가락을 넣는
따뜻한 커피라, 조금 색다른 첫 주문의 날도
두 번의 겨울이 지나는 동안 이제는
바리스타에게 피식거릴 추억이 되었네.
그는 커피가 품은 향이 참 좋았다.
커피 향 어린 말랑말랑한 안갯속에서
눈을 감고 숨을 들이켜 보았다.
난 커피구름을 탄 도요새야.
날다가 지쳐 잠시 쉬고 있지.
왜 도요새냐고? 나도 몰라.
그냥 떠올랐어. 아님 타조.
아, 타조는 못 나나?
대신 구름 위로 뛰어다녀야지.
발이 안 빠지려면 한 발을 떼자마자
다른 발을 짚고 다시 떼고...
이러면 안 빠지겠지.
건조기에서 막 꺼낸 솜이불처럼
보드라운 커피잔이 다가왔다.
예닐곱 테이블의 작은 매장,
그중 바리스타가 유일하게
직접 가져다주는 커피.
말 없는 오랜 고객에 대한
작은 서비스라고 할까.
그에게 조용히 옅은 미소를
받는 시간이기도 하지.
그는 검은 표면을 바라보았다.
얄랑이던 물결이 잔잔해지고
동굴 같은 침묵이 내린다.
테이블 사이를 구르던
피아노 음률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아.
잡초처럼 솟아나는 김이
어질어질 사라진다.
이걸 보고 있노라면
그의 걱정거리도 날아가는 듯했다.
불멍도 좋지만 김멍도 괜찮지.
찻잔을 찻숟가락으로 휘휘 저으면
창백한 사기잔이 커피 속에
녹아내리는 것 같아.
크림 커피인가.
설탕으로 만든 잔에
커피를 담으면 단 커피가 되겠지.
다 녹기 전에 얼른 마셔야겠는걸.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면
조금 천천히 마셔도 되겠다.
그는 가끔 자기가
미친 미친놈이 아닐까 생각했다.
미친놈이면 미친놈이지, 미친 미친놈이라면
정상이라는 건가. 미쳤는데 거기서 다시 미치면
정상 아니야? 그건 정상적인 정상과 다른가.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지 다른 사람이 알면
어쩌지. 아냐, 괜찮아.
난 모든 두려움을 사양해.
암, 그렇고 말고.
어느새 커피는 홀짝이기 좋게 식었다.
바리스타는
커피를 가져다주어도 바로 마시지 않고
우두커니 잔을 바라보는 그가
매일 신기하면서도 익숙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그리 할까.
찬물이 한 숟갈로는 부족한가.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이곳은 매일 여러 손님들의 까다로운 요구를
잘 들어주기로 소문난 카페다.
특히 부드러운 눈송이 크림을 입은
아인슈페너는 멀리서도 찾아와
줄 서서 기다리며 사진도 찍고 마시는
인기 음료다. 이것도 한 번 안 먹어보고.
나중에 그냥 한 잔을 서비스로 줄까.
한쪽에 쌓인 컵들을 씻으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20여 분에 걸쳐
커피 한 잔을 다 마신 그는
컵과 받침을 한 손에 하나씩 들고
일어섰다. 오늘의 커피도 좋았어.
그는 보일 듯 말듯한 미소를 지으며
받침과 컵을 차례대로 내려놓았다.
"고맙습니다."
"네, 안녕히 가세요.'
매번 반복되지만 질리지 않는 말.
문을 나서는 한낮의 볕이 쨍하다.
이제 다시 돌아갈 시간인가.
흔들리는 나무판자가 그의 마음이다.
그는 문을 닫았다.
그는 모든 두려움을 사양한다
keyword
커피
두려움
내면
Brunch Book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연재
365일 작가연습 프로젝트 6
24
벽장 뒤쪽에서
25
그녀는 방에 혼자 있다
26
'그는 모든 두려움을 사양한다'(피에르 레버디의 작품)
27
지금 이곳이 어딘지 모른다
28
검은 드레스에 대해 써라
전체 목차 보기
이전 25화
그녀는 방에 혼자 있다
지금 이곳이 어딘지 모른다
다음 2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