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드레스에 대해 써라

2024.6.5.

by 친절한 James


검은 드레스가 펄럭인다.

첫눈처럼 새하얀 햇살 아래

세상의 모든 빛을 흡수한

검디검은 비단결 무늬가 출렁,

소매 끝단 아라베스크 레이스는

지느러미처럼 물결치고

가슴을 여민 은빛 눈동자는

작은 구멍이 유난히 반짝인다.

눈물을 머금은 자리마다

애달픈 몸짓을 애쓰던

치맛단이 나풀거린다.


"슬픈 율동과 힘찬 발걸음이

어울리지는 않는 것 같아."

앞마당 한쪽 빨랫줄에서

옷걸이를 끄집어당기는

드레스를 만지작거리며

P는 중얼거렸다.

세월의 쪼임을 새긴 흰누런 손등이

드레스를 매만지다가 멈칫거렸다.

P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다가

쓸쓸한 미소를 들춰냈다.

실낱 같은 구름띠가

총총거리며 걸어가네.

푸들 한 마리도 뛰어가고

눈사람 커플도 발을 구른다.

머리 긴 소녀가 P를 굽어보며

미소 짓는다.

점점 날씬해지던 그녀는

어느덧 솜사탕이 되었다.


무지개 한 뼘을 새긴 앞마당은

꽃나무와 잔디를 한가득 품었다.

노른자를 품은 계란 흰자처럼

쉰 걸음 남짓 크기의 호수를 담은

앞마당은 P가 아끼는 장소다.

봄에는 대문 담벼락에서

화살처럼 솟아나는 개나리를 반긴다.

분홍빛 철쭉도 속속 눈을 뜬다.

대문에서 집으로 이어진 돌길을 따라

불붙은 꽃잔디가 춤을 춘다.

뽀얀 벽돌을 두른 오뚝이 모양 화단에는

저마다 봄의 향기를 뽐내는

색색 꽃망울들이 고개를 내민다.

오밀조밀 꿀벌들이 부지런을 떨며

봄소리에 생동감을 더한다.


"이젠 잘 마른 것 같군."

드레스를 쓰다듬던 손이

익숙한 솜씨로 옷을 거두었다.

옷을 걸친 팔 위에는

연노랑 수건들과 청록색 앞치마도

함께 누웠다. 살랑이는 바람이

촉촉한 물기를 거두고

메마른 추억만 남겨 놓았다.

빨래를 할 때 탈수는 가볍게 하고

늘어진 옷무리들을 빨랫줄에 걸면,

P는 아직 잊지 않은 기억들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 같았다.

쭈글거리던 슬픔도

물을 먹어 빳빳하게 펴지면

지난 시간이 팽팽하게 뛰어오르는 듯했다.


왁자지껄한 파티장을 뽐내며 걷던 드레스도,

이제는 만날 수 없는 그리움을

한 올 한 올 떼어내던 드레스도

다 지난 일이 되었다.

흘러간 시간을 담았던 옷자락은

보기 좋게 해져 애달픔을 달았네.

이제는 새 옷을 마련해도

좋지 않겠냐던 J의 잔소리도

바람결에 점점 희미해져 갔다.

"먹을 때 먹고 쓸 때 쓰고 살아."

"알았어, 아직 쓸만해, 괜찮아."

족히 백여 번도 더 되었을 대화가

아지랑이처럼 귓가에 맴도네.

P는 낡은 합판 상자에

검은 드레스, 맞춤 구두, 양말, 장갑을

차곡차곡 넣어두었다.


"글을 쓴다는 건 쉽지만 어려워."

오후 3시부터 습관처럼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던 J가 내뱉듯 말했다.

"그럼 어렵지만 쉬운 일이기도 하겠네."

소파에 기대 작고 두꺼운 양장본을

읽던 P가 고개를 들며 대꾸했다.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쉽지만 어렵고 또 어렵지만 쉬운 일."

악보를 넘기며 손가락들 가다듬는

J가 흥얼거렸다.

"그런데 이따 저녁은 뭐 먹지?"

"음, 점심을 거하게 했으니 간단히 먹자.

요구르트에 견과류 뿌려서 먹고

치즈볼 샐러드랑 곁들이면 되지."

"그래, 가볍게 먹으면 좋겠다.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오래전 어느 오후 짧았던 순간이

P의 머릿속에 번쩍였다.

특별한 일도 아니고

중요한 내용도 아니었는데

왜 이 장면이 생각났을까.

혹시 이게 안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었을까.

뭔가 숨겨진 큰 뜻이 있었던 건 아닐까.

"이젠 다락방에 오는 것도 힘들군.

날 좋은 날에 다시 정리를 해야겠어."

다락방 상자를 정리하고 계단을 내려오던

P는 거북이 같은 하품을 내던지며 중얼거렸다.

노랑빛 연갈색 나무계단이 아침 알람처럼

삐그덕거렸다. 10개 남짓 계단이

100개처럼 느껴지는구나.

그만큼 나이가 든 걸까.

예전에는 한걸음에 올라온 것 같은데...

피식거리던 입가 주름에서

빈 바람이 새어 나왔다.

"다시 뜰로 나가볼까?"

물 한 모금 천천히 들이킨 P는

노을 같은 걸음을 뉘엿뉘엿 옮겼다.


검은 드레스에 대해 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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