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들다
정강이에 또 멍이 들었다. A가 본 적 없는 멍자국이다. 언젠가부터 A의 몸에 하나둘 씩 멍이 생기기 시작했다. 자고 일어나면 허벅지 안 쪽에, 또 자고 일어나면 팔뚝에 엄지손톱만한 연보랏빛 동그라미가 생겨있었다.
“아, 또야.”
샤워타올로 조심스럽게 정강이를 문지르며 A는 작게 중얼거렸다. 양팔을 번갈아 들어올리며 다른 곳에 생긴 멍은 없는지 살펴보았지만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따스한 습기를 머금은 샤워부스에서 나와 머리를 털며 화장대 앞에 앉았다. 오늘은 월요일이라 서둘러 출근 준비를 마쳐야한다.
“어머, 여기도 있네!”
왼쪽 목덜미에 흐릿한 붉은 빛이 보였다. 분명 멍이다. 어제 화장을 지울 때만 해도 분명 못봤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확인한 멍 자국은 무엇에 눌리기라도 한 것처럼 조금 붉었다.
“이상하다, 자다가 부딪혔나?”
고개를 돌려 사이드 테이블을 아무리 노려봐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고민해도 답은 나오지 않고 시간은 기다리는 법 없이 뛰어간다. 늦어도 15분 뒤에는 문을 나서야했다.
“그렇죠? 이상하죠? 암만 생각해도 이상하다니까요, 왜 자꾸 멍이 들지? 내가 잠버릇이 사납긴하지만, 목 옆이나 허벅지 안쪽 같은데는 자면서 부딪힐 일이 없지 않아요?”
“그러게, 자기 병원 가봐야 하는거 아냐? 어디 안 좋은건지도 모르잖아?"
소리나게 얼음을 흔들며 말하는 건 옆자리 K.
"얘가 얼마나 건강한데 그래. 혹시 무슨 꿈이라도 꾼 거 아냐? 꿈에서 어떤 사건을 겪었는데, 그게 몸으로 나타나는거지.”
“에이, 언니 그게 뭐에요. 드라마도 아니고.”
“지난 주 종영한 <몽환> 이 딱 그런 설정이라니까, 한 번 꼭 봐봐, 강추야 강추. 아, 그리고 어제 한 구미호 봤어?”
짧은 점심 식사 후 테이크아웃한 카페라떼를 마시며 A는 같이 점심을 먹는 언니들에게 자신의 멍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맞장구를 치며 흥미롭게 듣던 같은 팀 K는 건강염려증 환자답게 병원가라는 말 부터 꺼냈다. 언제나 화제를 자기로 돌려놓는 재주를 지닌 고참 J는 잠시 호기심을 보이더니 이내 주말 첫방을 한 드라마 ‘구미호뎐’ 얘기를 꺼냈다. 덕분에 멍에 대한 호기심과 걱정은 잊어버린 채, A도 어젯밤에 본 장면을 떠올리며 바로 수다에 열을 올렸다.
월요일 밤에는 일찍부터 졸음이 찾아온다. 잠자리에 들기 전 샤워를 마친 A는 바디로션을 꼼꼼히 바르면서 멍든 곳을 찾아봤다. 이젠 자기 전 루틴이 되어버린 이 과정이 꼭 전셋집 하자 찾아내던 전주인 같단 생각을 하며 A는 피식 웃었다.
‘내일 아침에도 새로운 멍이 생기려나? 진짜 병원 가봐야하나? 이상은 없는데......'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는데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혹시 꿈에서 다른 세계를 탐험하고 오는건 아니냐고 묻던 J의 말이 떠오른 건 그래서였을거다. 정말 그런거라면 어떤 세계였을까? A는 영화에서나 봤음직한 여러 신비한 세계를 떠올리며 한 쪽으로 돌아누워 이불을 끌어당겼다.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낯선 일을 기대하자 잠이 더 사라졌지만 하루의 피로는 조금씩 불어나 오래지 않아 A는 깊이 잠에 빠졌다.
그때였다. 침대 밑에서 긴 그림자가 빠져나왔다. 길게 늘어난 촉수 같은 검은 그림자가 이불을 타고 올라가 A가 괴고 있는 오른 손목 바로 밑을 휘감았다. 몇 초간이었을까, 손목을 감은 채 부풀어오르던 검은 그림자는 A가 뒤척이자 순식간에 침대 밑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조그맣게 붉은 색이 번져나갔다.
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