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끗희끗한 흰머리를 보며
지난 9월 무렵부터 뿌리염색을 그만뒀다. 뿌리염색이란 머리카락 전체를 염색하는 것이 아니고 새로 올라오는 두피근처만 부분적으로 염색하는 것을 말하는데, 나는 멋내기용이 아니라 흰머리를 숨기기 위한 목적으로 해왔다. 길어도 두 달에 한 번은 뿌리염색을 해야 새로 나오는 흰머리를 감출 수 있었다. 번거로운 면도 없잖아 있지만 미용 서비스를 받는 순간이 편안하기도 했고 손질된 머리를 보면 기분전환이 되어 주기적으로 미용실을 찾았다. 짙은 머리색을 보며 다시 젊어진 기분을 만끽하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이었는데 왜 갑자기 염색을 그만뒀을까?
염색을 그만두기로 한 것은 약간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흰머리가 보여 염색하러 가야하나 고민하던 어느 날, ‘귀찮은데 꼭 해야 하나?’ 하고 떠올린 순간, 그냥 그만두기로 했다. 그러고 나서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이유가 있어 그만 둔 것이 아니라, 그만두고 나서 이유를 찾아 꿰어 맞춘 셈이다.
두세 달에 한 번씩 염색한 지 벌써 수 년째인지라 쉬지 않는 염색에 머리카락이 상하는 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자연스런 변화를 감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염색해대는 것이 지겹고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했다. 이미 진 시합인데 깨끗하게 포기선언을 못하고 필드에서 내려가지 않는 선수가 된 기분, 끝내고 돌아선 연인을 앞에 두고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기분이 들었다. 포기를 모르는 불굴의 의지도 아니고 이런 일에 내 에너지를 낭비하나? 이대로라면 죽을 때까지 계속 염색해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이제 그만 멈추고 싶었다. 물론 치솟는 물가에 끝을 기약할 수 없는 머리카락 염색비용도 아까웠다. 뿌리염색,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나?
뿌리염색을 안한 지 넉 달이 더 지났다. 거울을 볼 때마다 멜라닌색소가 빠진 힘없는 머리칼이 괜히 촌스러워 보인다. 갈색 머리카락 틈에서 존재감을 내뿜고 있는 흰색들은 무시하고 싶어도 무시가 되지 않을 만큼 눈에 잘 띈다. 보통 사람의 머리카락이 한 달에 1센티미터씩 자란다고 보면 지금 내 머리는 약 4센티 정도, 손가락 두 마디 길이의 부숭부숭한 흰머리가 여기저기서 빛나고 있는 상태다. 염치를 모르고 삐죽하니 올라오는 흰 머리들을 볼 때마다 염색을 그만둔 결정이 잘 한 것인지 살짝 고민이 들기도 한다. 동시에 신기하다는 생각도 든다. 성장이 다 끝난 몸에 아직 변화의 과정이 남아 있다니, 설레도 괜찮지 않을까? 자연스런 노화의 과정을 그냥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았다.
가을이 되면 나뭇잎은 색을 바꾼다. 사실 갈색으로 색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초록색소가 빠져나가 갈색 혹은 붉은 색 색소만 남아 색이 변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나무의 파릇한 색소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내 머리도 검은 색소가 빠져나가 하얀색만 남고 있다. 완고하고 억센 것들은 사라지고 유연한 부드러운 것들만 남아 흰머리로 자라야할텐데 지금 내 모습은 어떤지 잘 모르겠다. 하얗게 변해가는 흰머리처럼 현명함과 여유로움이 늘어 갈지, 반대로 좋은 기운들이 빠져나가고 힘없는 것들만 남아버리지나 않을지 스스로를 살피게 된다. 시간이 더 흐르고 전체적으로 흰머리가 자리 잡으면서 지금과 다른 분위기를 갖게 될 것이다. 어떤 모습이 될지, 나의 노화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