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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May 26. 2023

이야기가 들리면 마음이 열리는 곳

충남 서산 개심사에서

  충남 서산에는 마음을 열어준다는 작고 조용한 사찰이 하나 있다. 돌계단을 오르고 외나무  다리를 지나 연못 위를 건너다보면 어느새 마음이 열린단다. 오래된 더께가 가득한 굳은 내 마음도 열리길 기대하며 여름이 성큼 다가선 5월에 낯선 사찰로 향했다. 여느 절들이 그렇듯 사찰 입구는 산나물 파는 밥집과 기념품 가게가 늘어서 은근 활기가 넘쳤다. 관광객을 부르는 상인들의 목소리와 라디오에서 흐르는 음악소리가 가득찬 오전 10시. 설레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걸어가자 곧이어 ‘상왕산개심사’, 라고 쓰여 있는 산문이 보였다. 마음이 열린다는 절, 개심사(開心寺)다.

  


  여기서부터 절인가보다, 라고 생각하며 무심히 들어서는데 순간, 조금 전까지 들리던 왁자한 소음들이 등 뒤로 물러서며 고요함이 나를 사로잡았다. 이어 바람이 나무를 흔드는 소리, 알지 못하는 새소리, 함께 한 일행들의 발소리만이 천천히 울려 퍼졌다. ‘아, 여기는 속세와 다른 공간이구나!’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느려졌다.

  소박하게 흐르는 계곡물을 옆에 두고 돌계단을 따라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콧등에 송글송글 땀이 나기 시작했다. 도시에 최적화된 저질 체력과 나태한 몸뚱이로는 계단을 올라가는 것도 힘에 겨웠다. 결국 열리라는 마음보다 땀구멍이 먼저 열렸다. 노화 탓인지 속세에 찌든 탓인지 탄식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경내로 들어섰다. 숨을 고르며 고요히 마음을 씻는다는 백제식 연못 경지(鏡池)를 건너자 전각보수공사로 인한 소음과 쇳내음이 내 몸을 자극했다. 덕분에 경지의 참맛을 느끼기는 어려웠지만, 수령 150년의 보호수 배롱나무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데 큰 방해는 되지 않았다. 몇 달 뒤 온 가지를 뒤덮을 꽃을 상상하며 잠시 쉰 후 대웅보전을 향해 올라갔다.

 

   안쪽으로 들어서니 막 예불이 시작되고 있었다. 문 안쪽에서 스님이 설법을 전하시고, 문 바깥에선 순한 눈을 한 상주견 한 마리가 나른하게 엎드린 채 지나가는 관람객들의 카메라에 담기고 있었다.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고, 식당 개 삼년이면 라면을 끓인다했던가. 절에서 지낸 끝에 해탈이라도 했는지 짖는 소리 한 번 없이 고요히 앉아있는 것이 신기했다. 문 앞을 지키고 선 견공(犬公)때문에 고려시대 불상이라는 보물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가까이서 볼 수 없었지만, 조곤조곤 말씀을 전하시는 스님의 목소리와 단정히 앉은 불자분의 뒷모습에서 은은한 불심을 느낄 수 있었다.

  예불에 방해되지 않게 조심조심 걸으며 옆으로 발을 옮겼다. 먼저 뒤집어진 U자 모양으로 크게 휘어진 자목련과 한 무더기 피어있는 작약이 눈에 들어왔다. 막 피기 시작하는 꽃봉오리와 만개한 꽃, 익어가는 씨앗이 한 줄기에 같이 달려있었다. 꼭 탄생과 성숙, 노화와 죽음의 과정을 하나로 펼쳐놓은 것 같았다. 이 작은 식물에게도 부처의 가르침이 담겨있는 걸까.


  대웅전 동쪽에 위치한 심검당은 구불구불 휘어진 목재를 그대로 가져다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심검당 기둥의 느른하면서 초연한 색과 형태가 매력적이라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만져보았다. 완만한 곡선을 지닌 기둥을 쓸어보니 불룩하니 튀어나온 중년의 뱃살 같아서 처음 마주한 전각임에도 괜시리 친근하게 느껴졌다. 휘어지면 휘어진 대로, 구부러지면 구부러진 대로, 있는 모습 그대로의 나무를 사용해 건물을 지었던 목수의 마음과, 그 기둥에 기대어 불법을 쌓았을 스님의 마음을 생각하니 내 마음에도 경건함이 깃드는 것 같았다.


  심검당을 뒤로 하고 안쪽 해탈문으로 향했다. 사실 겹벚꽃과 청벚꽃으로 유명한 개심사지만 5월 말에 가까운 시기니 벚꽃을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전혀 없었다. 역시나 벚나무마다 꽂은 지고 무성한 잎과 검붉게 익어가는 열매들만 가득했다. 천천히 주변 경관을 둘러보고 내려가려던 길, 안양루 옆에서 아직까지 남아있는 벚꽃을 마주했다. 뜻밖이었다. 온통 초록으로 가득한 산사에 몽실몽실하니 달려있는 벚꽃이라니. 그것도 아직 싱그러움이 남아있는 분홍빛 꽃이었다. 운이 좋다고만 하기엔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마치 나를 반겨주기라도 하는 듯 정오의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꽃송이를 보고나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작은 림이 스쳤다. 부처의 가르침과 깨달음으로만 마음이 열리던가. 아름다운 것을 보고 감동할 때, 예상치 못한 기쁨을 누릴 때, 그 순간 감사함을 잊지 않는다면 그때 마음이 열리지 않을까.     



  다시 경지를 건너 사찰을 내려가는 길, 들어갈 때는 보지 못했던 검은 얼룩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니 엄지손톱만한 크기의 머리에 한 줄 꼬리를 달고 쉬지 않고 좌우로 움직이는 올챙이 떼였다. 어딘지도 모른체 무작정 머리부터 들이밀고 헤엄치는 올챙이들. 물속에서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올챙이들이 꼭 정신없이 일상에 쫓겨 사는 내 모습 같았다. 저렇게 몰려다니다가 어느 날 네 다리가 생겨나면 물 밖의 넓은 세상으로 나가 힘껏 울어대는 개구리가 되겠지. 아가미와 꼬리를 버리고 물 밖으로 뛰쳐나가는 개구리처럼, 나도 필요 없는 것들을 덜어내고 도약할 수 있을까? 이전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다른 모습으로 성장하라고 올챙이들이 내게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개심사를 돌아보는 동안 도시에서는 만나지도 듣지도 못한 말들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둥글게 휘어진 기둥, 여기저기 맺힌 씨앗, 계절에 거슬러 남아있는 꽃과 연못 속의 손톱만한 올챙이까지 모두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 이야기를 알아차릴 때, 고요히 귀 기울여 들을 때, 비로소 마음이 열리기 시작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의 마음을 열어주는 곳, 그곳이 개심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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