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어느 날, 고등 큰 아이 중간고사 즈음 이었을거다. 저녁으로 카레를 준비하는데 거실에서 교과서를 보던 큰도령이 국어시간에 배운 문학 얘길했다. 정호승의 <슬픔이 기쁨에게>와 이태준의 단편 <달밤>을 배웠는데 기억에 남는단다.
듣고보니 낯설면서 신기했다. 내가 배우던 시절과 교과서에 실린 문학작품이 많이 달라졌구나. 교과서에서 만나는 정호승 시인의 시라니, 아들은 어떤 마음으로 읽었을까? 시에 대한 감상을 물어본들 진지한 답변이 나올 것 같지 않았지만, 이태준의 단편은 못 읽어본 소설이라 궁금했다.
"<달밤>은 무슨 소설이야? 못 읽어본거네." 했더니 큰애가 대뜸 "읽어줄까?" 한다.
양파와 감자를 다지는 내 옆으로 다가온 아이가 교과서를 펼쳐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변성기를 지나 굵어진 목소리로, 어딘가 무성의하게, 약간은 자랑하는 듯, 교과서를 넘기며 읽는다.
소설은 성북동으로 이사온 '나'와 동네에서 알게 된 황수건의 이야기다. 우둔하고 똑똑치 못한 황수건이 이래저래 '나'에게 참견도 하고 마음을 주는데, 일자리에서 쫒겨나기도 하고 아내가 달아나기도 하는 부침을 겪는다.
아들은 읽으며 중간중간 나오는 사자성어 뜻을 아냐고 내게 묻기도 하고, 주인공의 대사가 어떤 의미인지 수업시간에 들은 선생님의 해설도 덧붙여 말해준다. 후드를 끄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냄비 옆에서 소설을 읽어주는 큰아이 목소리가 더해진다. 카레는 익어가고 이태준의 소설도 끝을 향해 간다.
한동안 연락이 없던 황수건이 어느 달밤에 안 피우던 담배를 태우며 홀로 걷는 모습을 목격했지만, '나'는 그에게 말을 걸지 않는 쓸쓸한 정경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카레가 눌지 않도록 천천히 주걱을 젖는 내 옆에서 책 덮는 소리가 선명하다. 여릿한 여운 가득한 마지막 문장까지 집중해 읽어 주더니 한숨을 쉰다. 자기는 이해가 잘 안되는데, 너무 서정적인 결말이라 비판도 많이 받았던 작품이라고 해설서에 실린 설명까지 친절히 읽어준다. 그러고는 다가 와서 굳이 교과서 속 삽화까지 보여준다. 시도 읽어달라고 했지만, 이제 유튜브 보겠다고 그냥 방으로 가버렸다.(그나저나 시험기간 아니었던가?)
아이가 방으로 들어가고 나서 감자와 고기가 뭉근히 잘 익은 카레를 불 위에서 내렸다. 평생 이 순간을 애틋한 추억으로 간직할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저녁은 천천히 먹기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