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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Jul 13. 2023

이게 다 밥을 못 먹어서

 어지럽고 기운이 없다. 지금 당장 책상 위에 엎어지면 산재처리 받을 수 있을까? 일 때문에 쓰러진 게 아니라서 어렵겠지. 평소보다 활력이 떨어지고  목소리도 잘 안 나온다. 심지어 작은 일에도 짜증을 참기 어렵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어제, 평소보다 점심을 적게 먹었다. 기어이 앞자리 숫자가 바뀐 몸무게를 줄여보려고 체중조절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필 저녁시간 모임이 잡혀있는 어제부터. 오후 업무 중에 허기지기 시작했지만 참고 정신없이 일을 끝냈다. 원래라면 퇴근 후 근처에서 간단히 밥을 먹고 모임에 갔을 텐데, 준비를 덜 해서 저녁을 먹을 수가 없었다. 그 때문이다. 약속장소로 가면서부터 약간의 두통이 시작되더니 모임 중에 손가락 끝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카페인으로 해결할 수 없는 강력한 포도당의 활약이 그리웠다.


 여차저차 모임이 끝나고, 후들거리며 집에 오니 9시 반. 씻지도 않고 컵라면 물부터 끓였다. 3분 기다릴 새도 없이 그야말로 흡입하듯 김치와 라면을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그러고 나니 급격하게 피로와 두통이 몰려왔다. 그냥 눕고 싶었지만 아무리 피곤해도 아들의 호르몬 냄새 베인 교복은 빨아줘야 했다. 식탁을 치우고 교복을 세탁기에 돌린 후 방으로 들어갔다. 잠깐 눈만 감았는데, 정신을 차리니 오늘 아침이었다.        


 아니 지금 7시 20분이 맞는 거야? 누가 내 시간을 잡아다 감춘 게 아니고? 오늘이 금요일은 맞고?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소용돌이치는데 몸이 알아서 욕실로 뛰어갔다. 옷을 벗다말고 갑자기 어제 세탁기에 넣었던 아들 교복이 생각났다. '맞다, 교복!' 지금 씻을 때가 아니었다. 후다닥 세탁실로 달려가 세탁기 문을 여니 물에 젖어 잔뜩 구겨진 교복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 안되겠다, 헹굼탈수 코스 한 번 돌려놓고 다시 욕실로 뛰어갔다.


 15분 안에 양치와 샤워를 마치고 화장까지, 트랙을 달리는 건 못해도 이건 웬만한 단거리 선수보다 빨리 해치울 수 있다. 그 사이 탈수가 끝난 교복을 꺼내 탈탈 털었다. 아들이 씻는 소리가 들린다. 얼른 말려줘야 지각하지 않는다.


 바로 헤어드라이기를 꺼내 '폴리에스테르 여름 교복'을 말리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는 옷을 돌리고 한 손으로는 미친 듯이 손목 스냅을 사용해서 위아래로 훑었다. 몇  분 말리다 아예 바지 주머니 입구에 드라이기를 끼워 넣었다. 바지가 이벤트 행사장 풍선처럼 부풀었다. 그대로 바닥에 내려놓고 옷을 갈아입었다. 어디서 약간 탄 냄새가 났다. ‘드라이기에 머리카락이 껴있었나?' 출근 준비를 마치고 교복과 드라이기를 분리하는데, 이런 망할 폴리에스텔 같으니라구! 주머니가 녹아서 눌러 붙었다. 드라이기 열로 딱딱하게 구워진 주머니에 조그맣게 구멍이 두 개나 뚫렸다. 그래도 바깥이 아니라 안쪽이라 표가 안 난다. 아들아 미안하다, 이제 이쪽에 동전은 못 넣겠구나.

 바지주머니에 구멍이 생겼거나 말거나 마지막 남은 습기까지 날려준 후 교복을 넘겼다. 아들은 엄마가 말려준 교복을 챙겨 입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현관문 소리가 나고, 그때서야 내가 아침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근처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사먹으라고 문자를 보내야하나 망설이다가 책상 위에 놓인 가정통신문을 발견했다. 건강검진으로 인해 아침을 먹고 오지 말라는 안내였다. 큰 애는 아침을 안 먹어도 되는 날이구나.       


 출근해서 컴퓨터를 켜고 커피부터 챙겼다. 빈속에 카페인은 안 좋다지만, 위장보다 뇌가 더 급하다. 혈관 속에 카페인을 때려 넣지 않고 일을 시작하는 법을 아직도 모르겠다. 그러고 나서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데, 어깨와 입 꼬리가 자꾸 쳐진다. 어떻게  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이렇게 힘이 없는 건, 어제 저녁을 제때 먹지 못해서다. 제대로 먹었으면 교복빨래를 놓치지도, 작은 애 아침을 못 챙기지도 않았을 거다. 할 일을 제 때 못해놔서 스스로에게 짜증이 나는 것도, 그 할 일을 함께 하지 않은 남편에 대한 분노와 내 분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것도, 자기 일을 자기가 챙기지 않는 아들에 대한 못마땅함과 무엇보다 덕분에 정신없어진 내 아침시간까지, 다 밥 때문이다. 밥을 먹었으면 생겨나지 않았을 거다.


 그러니까 우선 오늘은 저녁부터 든든히 먹자. 치맥도 좋고 삼겹살과 볶음밥도 좋다. 든든히 먹고 기력을 회복해서 어깨와 입 꼬리를 올리자. 그러고 나면 또 내일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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