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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Jul 27. 2023

살면서 잘 한 일 세 가지

쉽게 꼽을 수 있나요?

  릴 때, 아마 국민학교 고학년 쯤, 선생님이 우리 나라 역사가 반만년이라고 알려주셨다. 반만년이라니. '와, 엄청길고 오래되었구나'라며 감탄했지만 실상은 4천 몇 년이라는걸 알고 '과장도 심하네' 라고 생각했다. 조금 실망도 한 것 같다. (중국을 알고 나선 이 정도는 과장도 아니구나, 하고 깨달았지만)


  뜬금없이 반만년이라는 말을 꺼낸건 건 내 나이 때문이다. 사십 후반이라고 하면 너무 밋밋한데  반백년 나이라고 하면 뭔가 엄청나게 오래 살았고 엄청나게 연륜이 쌓인 것 같다. 어딘가 '힙'한 느낌마저 든다. 좋다. 오랜 역사를 지닌 민족의 후예답게 앞으로 내게 나이를 물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반백년이라고 말해야지.



  

누구라도 반백년쯤 살그 동안 잘한 일이 아무리 못해도 세가지 이상 쯤 되지 않을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두 개 이상 안 떠올랐다. 몇몇 술자리에서 이 화제를 꺼내서 꽤나 진지하고 즐겁게 대화를 나눴더랬다. 손쉽게 손가락을 접으며 세 가지 이상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나처럼 두 가지에서 막힌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술이 절로 들어가곤했다.


  가 지금껏 살면서 제일 잘 한 일 중 첫 번째는 '교사가 된 것'이다.

90년대 초반에는 부모님이 정해주신 대학, 부모님이 정해주신 과에 들어가는 것이 그렇게 이상하지 않았다. 딱히 대학에 가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고생하는 엄마를 위해 대학생 딸이 되어줘야겠다는 외적동기만으로 공부했던 딸이었다보니 크게 갈등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니 전형적인 K- 장녀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여차저차해서 교대생이 되었고 어찌저찌해서 임용에 합격하고 이러저러한 교사가 되었다.


  교사로서의 내 모습을 말하자면 사실 봉황 무리에 끼어든 까마귀 같아서 부끄럽다. 모자란 세월을 보낸 부족한 교사지만, 나는 교사라서 감사하고, 행복하고, 기쁘고, 즐겁고, 보람차다. 나를 교사로 부른 신의 뜻과 목적이 분명히 있다고 믿는다. 요즘 처럼 힘든 시대 상황,  갈수록 좁아드는 입지에도 불구하고 사명감과 기쁨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직종이라는 것 자체가 얼마나 다행인지. 내 가정을 경제적으로 책임질 수 있다는 것도 커다란 감사다.


   번째로 잘 한 일은 자식을 '둘' 낳은거다.

자식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딩크를 결정했다고 해서 미성숙한 것도 아니고 이기적이라서 자식을 안 낳는 것도 아니다. 삶의 선택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며 살아가는 또다른 모습일 뿐이다. 내가 아이를 키운다고, 내가 부모가 되었다고 부모가 아닌 사람들보다 더 뛰어나거나 성숙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간혹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볼때마다 뭐라 대꾸해야할 지 막막해진다. 이미 대화가 통하지 않을거라는걸 알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나는 자식을 낳았다. 그것도 둘이나. 많이 고민하고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결혼하면 당연히 애를 낳아야하는거라고 생각했다. 늦게 결혼했으니 늦지 않게 낳아야한다고 생각해서 첫 애를 낳았고, 마흔이 되기 전에 출산을 끝내고 싶어서 네 살 터울로 하나 더 낳았다.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아무런 도움 받을 곳도 없는 늙은 엄마 주제에 왜그리 용감했었는지. 요즘이라면 둘째는 생각도 말라고 주변에서 말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낳았는데, 키우는 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어려움이 아니었다. 아이가 둘이라고 두 배로 힘든게 아니었다. 몇 곱절로 더 힘들었다. 뽑기 운이 없었던 건지, 내 유전자의 문제인건지 둘 다 공부를 잘하거나 모범적인 아이들이 아니었다. 영유아기는 미치기 직전까지 힘들었다면 아동기는 미치고 팔짝 뛰게 힘들었고, 사춘기는 나 죽었소 해야 지나간다. 아직도 대입과 취업과 군대 등등 내가 감당해야할 산이 몇 봉우리가 더 남았을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나는 아이가 둘인게 감사하고 다행스럽다. 두 아들이 서로 위로하고 보듬어주는 모습을 볼 때마다 뿌듯하다. 시덥잖은 일로 싸우고 다투다가도 같이 씻고 먹고 낄낄대며 다시 한심하게 붙어서 노는 꼬라지가 그저 기특하기만 하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 각자 외따로 떨어진 섬이라지만 그 중에 조금 더 가까운 곳에 있는 섬 하나가 있다면 덜 외롭지 않을까? 성인이 되어 각자 서로의 가정이 생기면서 점차 데면데면해지고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될 수도 있지만, 살면서 저기 보이는 불빛, 망망대해에서 찾는 등대가 하나 더 있으면 조금 덜 힘들거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내 자매와 그렇듯 말이다.


  더워죽겠는데, 100킬로그램이 넘는 형아가 자기 몸무게 반도 안되는 동생을 공주님 안기로 들고선 빙빙 돌며 놀다 침대에 같이 쓰러진다. 그러고는 바보같이 낄낄대고 서로 웃는다. 엄마 모르게 입으로 욕도 주고받는다. 밤이 늦었는대도 자지 않고 둘이서 시시껄렁한 유튜브를 같이 보다가 뭐땜에 그러는지 화를 내며 엄마에게 서로를 이른다. 그런 꼴을 보면서도 나는 잘했다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눈에 뭐가 씌인건지도 모르겠다.

작은 아들이 큰 아들에게 쓴 카드

  


  오래도록 세 번째로 잘 한일을 꼽지 못했다. 남편과 대화를 하면서도 그랬다. 빈말로라도 남편과 결혼한 일을 잘한 일로 꼽을 수가 없었다. 항상 "그러게, 세 번째는 아직 없네...."하고 말을 흐렸다. 게다가 남들에게 자랑할만하다거나 남들이 인정할만한, 어딘가 그럴듯한 성취를 거둔 것도 없었다. 꼭 비교가 아니더라도 내가 스스로 만족할만한 어떤 경험을 하거나 만들어 낸 것도 없고, 의지력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살면서 잘 한 일이 두 가지 밖에 없다는게 괜히 초라하게 느껴졌다. 꽤나 오래도록.


  그런데 이제야 잘 한 일 하나가 마음속에 떠올랐다. 살면서 잘 한 일 세 번째, 바로 글쓰기다.

 6년 전, 지역의 독립서점에서 운영하는 글쓰기 프로그램에 참여한 일이 계기가 되어 조금씩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딱히 SNS를 하는 것도 아니고 배우는 것도 아니라 꾸준히 쓰지는 않았다. 그러다 브런치를 알게 됐고, 작가신청을 하고 나서는 좀 더 정돈된 글을 쓰고 싶어졌다. 부족하거나 말거나 띄엄띄엄 브런치에 글을 써나가다보니 햇수로 삼년 째가 되었다.(벌써! 그리고 뭘 했다고?)


  사실 큰 애 육아일기를 블로그에 쓴 것부터 따지자면 오래도록 무언가를 썼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저 기록일 뿐이었다. 내면에서 아무런 변화를 거치지 않은 단순한 인풋과 아웃풋. 지금은 어떤 내용이건 좀 더 나를 담아내려 노력한다. 그저 일상의 기억, 내면에 떠다니는 조각들을 건져내는 글들이지만, 이 글을 통해 내가 정돈되고 나를 이해하고 타인과 소통하려 한다. 이 경험이 특별하고 소중해서 주변에도 글을 쓰라고 자꾸 들이대고 있다.


  특히 브런치에 글이 쌓이는 것을 보는 만족감이 크다. 브런치를 통해 읽는 글들도 좋고 미온하면서 선한 연대도 좋다. 지금은 단지 내가 좋아서 쓰고 있지만 쓰다보니 인정받고 싶은 욕심도 생긴다. 욕심이 욕심으로만 끝나지 않으면 좋겠다.


  제는 글을 쓰는 시간이 내게 가장 중요한 시간이 되었다. 야금야금 나이들어 반백년을 앞둔 지금, 나는 나를 위해 글을 쓴다. 글쓰기가 좋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내가 좋다. 살면서 제일 잘 한 일이 글쓰기가 될까? 모르겠다. 앞으로 반백년쯤 더 살면 알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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