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자기 입장에서는 옳고 자기 인식수준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삶이 징그럽게 외롭고 고독한 대목이다. (p77)
매일 출퇴근할 때 버스를 탄다. 비슷한 시간에 타고 내리며 기계적으로 카드를 찍는다. 창밖으로 보는 풍경을 감상할 때도 있고 잠깐씩 핸드폰을 볼 때도 있다. 주말을 제외하고 거의 매일 타다보니 이제는 운행스타일까지 파악하게 된 기사님도 있고 같은 노선을 반복하며 얼굴만 익힌 타인들도 생겼다. 하지만 버스는 버스일 뿐. 출퇴근 30분 정도 나를 옮겨주는 이동수단이라는 것 말고 내게 다른 의미는 없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버스는 일상의 한 정물일 뿐이고 운전하는 기사는 아무 관심 없는 아무개일 뿐이었다. 그런데 주말 동안 읽은 책 한 권 덕분에 내일 출근 시간에는 지금까지와 다른 마음으로 버스를 타게 될 것 같다.
[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허혁/수오서재
전북 전주 시내버스 기사로 일하는 입사 5년차(2018년 당시) 기사가 기록한 삶의 노선도다. 작가는 시내버스를 운전하며 마주치는 손님들과의 일상과 같은 노선을 오가며 벌어지는 소소한 일들, 기사들의 노동 현장, 도로 상황 등 버스로 갈 수 있는 모든 곳을 누비며 마주친 것들을 솔직하고 막힘없는 문장으로 써내려간다. 때때로 기사들이 저지르는 도로법규위반들이나 진상승객을 대하는 속마음을 읽으면 직업인의 애환보다 이렇게 솔직해도 되는 거야, 라는 감상이 먼저 터져 나올 정도다. 그 지점이 이 책의 최고 매력이다.
-기사 생활 이 년여 만에 터득한 시내버스 최고의 덕목은 닥치고 빨리 달리는 것이고 승객을 위한 최상의 서비스는 친절한 언행이 아니라 과감한 신호위반이다!(p133)
- 시내버스의 세 가지 큰 덕목 (전략)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p169)
전주 시내버스 각 노선별 운행하며 일어나는 일상의 다사다난한 일들, 시내버스 기사들의 격무와 버티는 사람들의 일상 등 운수노동자의 건강한 일상도 눈이 부시지만 말끔한 문장과 생생하면서 문학적인 표현들도 집중해서 읽게 만든다. 하루 열여덟 시간 운행 후 스트레스 수치는 인간이 작은 포유류였을 때 아나콘다를 만난 수치와 맞먹는다(p51)는 대목이나 우주가 보자기라면 도시는 시내버스가 박음질한 밥상보(p74)라고 표현한다는 대목들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살면서 한 번도 버스를 안 타본 사람, 버스에 얽힌 이야깃거리 하나 없는 사람이 있을까? 책을 읽으면 작가의 버스에 올라 함께 전주시내를 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기사 뒷좌석에 앉아 버스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고 내가 겪었던 지난 이야기들을 하나 씩 떠올려 보는 그런 기분. 이제는 출근길 버스를 기다리며 종종 이 책을 떠올릴 것 같다.
ps 1 - 버스 한 번도 안 타본 사람........이재용?
ps 2 -2018년에 나온 책인데 절판인 것이 아쉽다. 다양한 노동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담긴 책들이 더 많이 나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