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에 산세베리아가 냉해를 입었다. 우리 집에 놀러온 남동생에게서 기세가 좋다는 칭찬을 받아 한껏 식집사의 자부심이 되어줬던 그 산세베리아 말이다.
한파를 잘 이겨낸 줄 알았는데 여기저기 상한 잎이 보였다. 부랴부랴 무른 부분을 떼어내고 상한 밑둥을 잘라냈다. 뿌리가 멀쩡한 아이들은 새로 큰 화분에 좋은 흙을 잔뜩 담아 옯겨심고 상한 부분을 자른 잎은 따로 모아서 한 곳에 잎꽂이 해두었다. 낱장 잎들이 흙속에 칼처럼 삐죽삐죽 꽂혀있는 모양새라 예쁘진 않았지만 살아있는게 어디냐 싶었다. 부디 잘 자리잡아 뿌리 나고 자구 생기기만 기다렸다. 그게 올 2월말인가 3월초였다.
그때 부터 베란다에 두고 생각나면 들여다보고 말 걸며 오래 두었더니, 올여름 폭염 속에서 새 잎이 나왔다. 장장 6개월의 기다림이었다.
애지중지 물 주고 영양제 줬건만 아무런 변화 없이 처음 심은 그 모습 그대로인 산세베리아를 6개월 동안 기다렸다. 뿌리가 나오고 있는지 파보고 싶은 마음을 눌러가며 해 드는 곳 따라 화분을 옮겨주며 돌보았더니, 입추가 지난 이제사 새잎이 여기저기서 돋아나고 있다. 이 연한 초록식물도 6개월을 버텨서 새 잎을 내는데, 사람도 새로운 시작을 하려면 6개월 쯤은 기다려 줄 수 있는 것 아닐까. 새삼 열일곱 큰아들이 떠올랐다.
사실 우리집 큰아들은 고등학생이 되어도 공부 할 마음도 태도도 보이지 않아 내내 부모 속을 끓였다. 스스로 할 때까지 기다리자고 다짐하지만 방학동안에도 여전히 게으른 아들을 보며 닥달을 안할 수가 없었다.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위해 제발 최소한의 준비만 하자고 매일같이 설득해야 책상 앞에 30분 앉을까 말까하는 아들을 보며 인내심이 바닥나서 악다구니친 날도 여럿이다. 속이 끓는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성적의 높고 낮음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와 태도가 고약해서 남편도 나도 매일 같이 희망을 품었다가 포기하고, 다시 희망을 품었다 또 포기하며 지냈다. 오늘이라고 다를까. 한숨이 절로 나온다.
눈에 띄는 향상은 없을지라도, 엉망인 국영수 점수가 높아지지는 않더라도, 그래도 아이가 몸과 마음이 꾸준히 자랐으면 좋겠다. 매일의 변화가 보이지 않아도 아이 내면에서 조금씩 조금씩 지식과 사고가 확장되면 좋겠다. 부디 앎의 기쁨, 탐구의 성취감, 소통의 희열을 느끼면서 대입과 성적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하고 싶은 분야를 찾아 몰입하고 파고들기를 바란다. 아이는 믿는 만큼 자란다고 여기저기 말하고 살아왔지만, 사실 자식을 믿는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근거가 없는데도 맹목적으로 믿는 것, 그게 부모의 애정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오직 부모만이 할 수 있는 어리석은 만큼 숭고하고 아름다운 그 믿음말이다.
그래서 연 초록으로 빛나는 산세베리아의 새 잎을 보며 혼자 뿌듯했다. 내가 잘 해서가 아니라, 믿음과 기다림의 증거를 하나 찾은 것 같아서. 애정을 지닌 대상이 보여주는 기다림에 대한 실체있는 물증을 본 것 같아서 묘하게 흡족했다. 무려 여섯 달 동안 산세베리아 새 잎을 기다렸는데, 사랑하는 내 아이가 자라는 것을 몇 년이고 못 기다려줄까.
뽀족하게 쏘옥 내민 작은 자구를 본게 지난 주 였는데 오늘 아침에는 돌돌말린 모양으로 후욱 올라온 모습을 봤다. 가을 되기 전에 어여쁜 연녹색 무늬의 새 잎을 여럿 볼 수 있을것 같아 기대가 된다. 가을동안 잘 키우고 실내에서 겨울을 난 다음 내년 봄에 예쁜 화분에 옮겨줄까, 폭염 지나면 넓은 화분으로 옮겨 실컷 뻗치며 무성하게 자라라고 해줄까, 혼자 상상으로 기왓집을 지었다 허물고 있다. 어찌 되었든 다시 기세 좋게 자라라고 응원할 뿐이다. 산세베리아도, 철없는 우리집 고딩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