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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Sep 03. 2023

와인과 순대

오늘의 음주기

   오늘 안주는 순대와 떡볶이다. 세련된 실내 장식의 프랜차이즈 분식집이 아니라 오래된 아파트 상가 떡볶이 집에서 파는 옛날식 떡볶이와 순대. 인심 좋은 주인아주머니가 내장도 잔뜩 썰어 푸짐하게 담아주신 순대 1인 분에 떡볶이와 튀김까지 섞어서 사들고 왔다. 순대가 있으니 오늘의 술은 레드와인으로 골랐다. 돼지고기와 와인은 찰떡궁합이다. 나는 주종을 정하고 그에 맞는 안주를 고르는 게 아니라 먹고 싶은 음식이 떠오르면 자연스레 그에 어울리는 술을 같이 준비하는 편이다. 실험적이고 색다른 조합도 재미있지만 전통적인 페어링도 만족스럽다. 오늘은 클래식이다.      


  사실 오늘 마시려는 와인의 이름은 잘 모른다. 주류 판매점에서 패키지가 귀여워서 사두었던거지 맛을 알고 향을 알아서 산 것도 아니다. 선이 우아한 유리병이 아니라 우유팩 같은 종이팩인데 꼭 오렌지 쥬스처럼 디자인이 세련되고 깜찍해서 사두었다. 이름은 발음을 모르니 그대로 영어로 옮겨보자면 SANCRISPINO다. 뒷면에 붙은 스티커에는 한글로 선크리스피노 바이오 레드라고 써있지만 뜻은 모른다. 이탈리아산 도수 13도 짜리 500ml의 와인이 오늘 내 혼술 친구다.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좋게 말하면 음주탐색기쯤 되고 솔직하게 말하면 음주 작성 글이다. 술 마시고 하는 일중 제일 나쁜 것은 음주운전이고 그 다음이 헤어진 연인에게 전화걸기, 그리고 세 번째 쯤으로 꼽을 수 있는 게 취해서 글쓰기가 아닐까 싶다. 새벽에 감성 충만 해서 쓴 글도 아침에 읽으면 부끄러워 지우기 마련인데 취한 상태에서 글을 쓰다니, 이걸 맨 정신으로 어떻게 퇴고를 한단 말인가. 고민이 되지만 이 글의 목적은 음주탐색기(!)이므로 부끄러워하거나 퇴고에 대한 걱정은 치워두고 일단 술을 한 잔 더 마시고 글을 이어서 써보도록 하자.     


  술을 한 잔 마시면 식도를 타고 내려온 알콜이 위에 들어가 순식간에 흡수되어 혈액을 타고 온 몸으로 퍼진다. 첫 잔을 마시면 순간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게 느껴진다. 그 순간이 최고다. 그 순간을 느끼기 위해 술을 마신다. 오로지 나만 알고 있는, 나만 경험하는 느낌이다. 계속해서 두 잔, 세 잔 더 마시면 다시 힘이 돌고 기운이 생긴다. 슬그머니 내려갔던 무릎이 다시 올라오며 얼굴에 생기가 돌고 명랑해진다.           


  안주를 곁들여 두 잔 세잔 먹다보면 몸이 나른해지고 살짝 땀이 난다. 순대와 떡볶이로 시작해서 크림치즈와 크래커, 칼칼한 겉절이김치와 아삭한 단무지까지 안주로 먹어 치웠다. 이쯤 되면 술을 마시기 위한 안주인지 안주를 먹기 위한 술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하룻동안 쌓인 긴장이 풀어지고 마음의 장벽이 느슨해진다. 딱 좋은 상태다.      


  얼마 전에 유튜브에서 알콜은 원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게 한다는 영상을 봤었다. 술을 마셔서 사람이 이상하게 변하는 게 아니라 이성으로 가리고 있던 원래 모습을 술이 드러낸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술 마셨을 때의 모습이 원래의 내 모습이라는 거다. 그 이론에 따르면 나는 살기 위해 썼던 마스크를 버리고 원래 내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술을 마시는 거다. 통제와 긴장으로부터의 해방이요 내 근원의 회복을 위해 마시는 거다. 그러니 그만 마시라고 나를 말리지 마시라. 술을 마신다는 것은 본래의 나를 탐구하기 위한 경건한 과정이다. 충분히 마셔야한다.       


  한 모금에 안주 하나씩 먹다보니 어느덧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서 잔에 따랐다. 이쯤에서 오늘의 음주탐색기를 마무리해야한다. 그런데 몇 번을 반복해 읽어도 도무지 이 글의 끝을 어떻게 맺어야할지 잘 모르겠다. 술을 한 병 더 마시면 근사한 마지막 문장이 떠오를까?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거면 일단 해보는 게 나은 선택 아닐까? 그렇다면 더 마셔봐야 알 수 있다는 뜻이니 한 병을 더 마셔보고 판단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이번에 집 앞에 새로 피자스쿨이 오픈했던데, 피자? 아니면 좀 뜨끈한 국물? 고민은 즐거움을 미룰 뿐이다. 결정했다. 2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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